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019
한자 崇陵
영어공식명칭 Sungreung
이칭/별칭 현종 숭릉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674년연표보기 - 숭릉 내 현종의 능 조성
조성 시기/일시 1684년연표보기 - 숭릉 내 명성 왕후의 능 조성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41년 - 현종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42년 - 명성 왕후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74년 - 현종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83년 - 명성 왕후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70년 5월연표보기 - 숭릉 사적 제193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12월 - 숭릉 정자각 보물 제1742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6월 - 숭릉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현 소재지 동구릉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지도보기
성격 유적/능묘
양식 쌍릉
관련 인물 현종|명성 왕후
관리자 문화재청 조선 왕릉 동부 지구 관리소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현종·명성 왕후의 능

[개설]

숭릉(崇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현종(顯宗)[1641~1674]과 현종의 비(妃) 명성 왕후(明聖王后)[1642~1683]의 능이다. 현종은 조선의 제17대 왕 효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장유(張維)의 딸 인선 왕후(仁宣王后)이다. 1641년(인조 19) 효종이 봉림 대군(鳳林大君)으로서 청나라 심양(瀋陽)에서 볼모로 있을 때 태어나,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1645년(인조 23)에 인조(仁祖)의 맏아들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아버지 봉림 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현종도 자연스레 원손(元孫)이 되었다. 1649년에는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며, 1649년 효종이 즉위한 후 1651년(효종 2) 왕세자가 되었다. 1659년에 효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현종의 즉위 기간 중에는 상복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이어졌으며, 조선 중화 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674년 현종이 사망한 후, 치세 당시를 기록한 『현종실록』의 내용을 두고 붕당 간의 대립이 이어져 『현종 개수 실록』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명성 왕후의 본관은 청풍으로, 아버지는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다. 명성 왕후는 1651년(효종 2) 세자빈에 책봉되어 현종과 혼인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명성 왕후는 매우 명석하였으나, 때로는 정사에 깊이 관여할 정도로 과격한 면이 있었다고 한다. 1683년(숙종 9)에 창경궁에서 사망하였다.

[위치]

숭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지역의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능역 남쪽이 낮고 습하여 진입로에 물난리를 겪기도 하였으나 능역은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변천]

숭릉은 1674년 8월 현종이 사망하자 조성되었다. 1674년 2월 효종의 비 인선 왕후가 사망하여 능을 조성한 직후였기 때문에, 명성 왕후는 연속된 능 조성 사업으로 인한 어려운 재정 상황을 고려하여 숙종에게 능을 위한 새로운 석물을 만들지 말고 옛 영릉(寧陵)의 석물을 사용할 것을 청하였다. 영릉은 효종의 능으로, 본래 1659년 건원릉 서쪽에 조성되었다가 1673년 여주 세종(世宗)의 영릉(英陵) 옆으로 옮겨간 바 있다. 이때 옛 영릉의 석물을 함께 옮겨 가지 않고 땅에 묻었는데, 현종숭릉을 조성하면서 묻었던 옛 석물을 꺼내어 다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조선 왕릉 중에서 옛 석물을 꺼내어 재활용한 첫 사례에 해당한다. 산릉을 조성하는 공역 중에 승려의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드러나 문제가 되기도 하였으나, 깊이가 그리 깊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고 광중의 밖이라는 이유로 그대로 조성 작업을 진행하였다. 1683년 12월 명성 왕후가 사망한 후, 현종의 능 왼쪽에 명성 왕후의 능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른다.

[형태]

숭릉은 국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雙陵)의 형태이다. 능침 공간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가장 위의 상계에는 봉분이 있다. 봉분은 모두 병풍석(屛風石)[능, 묘의 봉분 둘레에 병풍같이 둘러막아 쌓은 돌]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欄干石)[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기둥 모양의 돌]만 설치하였다. 능침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무덤의 앞에 설치해 놓는 직사각형의 돌]이 각각 놓여 있다. 좌우와 뒷면에는 곡장(曲墻)[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와 좌우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을 둘렀으며, 상계에는 석양·석호·망주석 등의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중계에는 장명등·문석인·석마가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 등의 석물이 있다. 능침 공간의 아래는 제향 공간으로, 정자각이 세워져 있다. 정자각은 조선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팔작지붕의 형태로 건립된 것이다.

[금석문]

숭릉 정자각에서 능침 공간을 바라보면 오른쪽에 비각이 있다. 비각 내에는 숭릉의 표석이 건립되어 있는데, 이는 1720년(경종 1)에 건립 논의를 시작하여 1721년에 완공한 것이다. 표석 전면에는 전서로 '조선국현종대왕숭릉명성왕후부좌(朝鮮國顯宗大王崇陵明聖王后祔左)'라 새겨져 있다.

[현황]

숭릉이 속한 구리 동구릉 전체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6월에는 조선 왕릉 전체가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11년 12월에는 숭릉 정자각이 보물 제1742호로 지정된 바 있다. 현재 숭릉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숭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중 하나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실의 문화와 왕릉 연구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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