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2054
한자 羅萬甲
영어공식명칭 Na Mangap
이칭/별칭 몽뢰(夢賚),구포(鷗浦)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산16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미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나만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23년 - 나만갑, 순릉 참봉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4년 - 나만갑, 숭문관 검지 정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25년 - 나만갑, 예문관 검열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1년 - 나만갑, 홍문관 부수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4년 - 나만갑, 홍주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636년 - 나만갑, 병조 참지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42년연표보기 - 나만갑 사망
거주|이주지 영천 - 경상북도 영천
부임|활동지 홍주 - 충청남도 홍천
유배|이배지 남해 - 경상남도 남해
묘소|단소 나만갑 묘와 신도비 -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산163지도보기
성격 조선 후기의 문신
성별
본관 안정(安定)
대표 관직 홍문관 부수찬|홍주 목사|병조 참지

[정의]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몽뢰(夢賚), 호는 구포(鷗浦)이다. 아버지는 나윤급(羅尹級), 어머니는 한성 참군(漢城參軍) 김호선(金好善)의 딸이며, 할아버지는 나윤침(羅尹忱), 장인은 정엽(鄭曄)이다.

[활동 사항]

나만갑(羅萬甲)[1592~1642]은 1613년(광해군 5)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권력을 가진 간신의 사론(邪論)을 두둔한 사람과 인사하지 않아 유명해졌다. 이해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귀향하여 오로지 책을 읽고 학문을 닦았다.

10년 동안 고향에서 독서로 나날을 보내던 중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순릉 참봉(順陵參奉)이 되었고,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1624년에 숭문원 검지 정자(崇文院檢知正字)가 되었다. 이어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호조 좌랑이 되었다가 이괄(李适)의 난이 평정된 후 견책당하여 병조 낭관에서 파직되었다. 1625년 예문관 검열을 거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이때 노서(老西)의 거두인 김류(金瑬)가 북인(北人)인 남이공(南以恭)을 추천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다가 박정(朴炡), 유백증(兪伯曾)과 함께 좌천되어 강동 현감(江東縣監)이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왕이 강화도로 피난하게 되자, 종사관으로 왕을 호종하였다. 1628년 환도한 후, 병조 정랑,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여 풍기를 바르게 하고 도민을 서로 경계하게 하였다. 이때 포로 문제로 인해 탄핵을 받고 귀양가게 되었다. 1631년 홍문관 부수찬과 사간원 헌납이 되었으며, 1634년 홍주 목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 참의에 올랐으나 시정을 논하다가 파직당하였다. 인목 대비의 상에 낭청(郎廳)을 맡아 일을 잘 처리하니, 장례가 끝난 뒤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지로 승진되었으나 어머니 봉양을 위해 경상북도 안동으로 내려갔다. 다음해 형조 참의가 되어 선종의 묘인 목릉(穆陵)이 비로 붕괴된 것을 논하다가 파직당하여 한강 밖으로 물러나 머물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기용되었으며, 이어 병조 참지가 되어 군량 공급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청과 강화 조약을 맺은 후 무고를 받아 남해(南海)로 유배되었다. 1639년 유배에서 풀려나 경상북도 영천으로 이사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1642년(인조 20)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나만갑의 저술로는 『병자록(丙子錄)』 과 『구포집(鷗浦集)』이 있다. 『병자록』은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병자 남한 일기(丙子南漢日記)’ 혹은 ‘백등록(白登錄)’이라고도 불린다. 한문 필사본으로 3권 1책이며, 국립 중앙 도서관과 서울 대학교 규장각 및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1658년(효종 9)에 건립하였는데 김상헌이 글을 지었다. 추기(追記)는 송준길(宋浚吉)이 글을 쓰고 손자 나양좌가 지었다. 김수항이 글을 지은 지명(誌銘)과 송시열이 글을 지은 묘표(墓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