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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904098
한자 李鳴世
이칭/별칭 치선(致善),봉암(鳳岩)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종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3년 2월 18일[음력]연표보기 - 이명세 생
수학 시기/일시 1903년연표보기 - 성균관 박사
수학 시기/일시 1904년연표보기 - 한성법관양성소[현 서울법대 전신]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일본 와세다의숙 입학
몰년 시기/일시 1955년 4월 14일[음력]연표보기 - 이명세 졸
출생지 용인시 원삼면 사암리 495 지도보기
묘소 용인시 처인구 해곡동 양산계좌
성격 사업가|교육자
성별
본관 전의
대표 경력 원삼고등공민학교 교장

[정의]

일제강점기의 경기도 용인 지역의 사업가이자 교육자.

[개설]

1903년 성균관 박사에 피명되고 1904년 한성법관양성소[현 서울법대 전신] 3기생으로 졸업하였다. 고향인 원삼면에서 금광산업, 가난한 이들의 규휼, 교육사업 등으로 원삼면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치선(致善), 호는 봉암(鳳岩). 고려 개국공신 이도(李棹)의 29세손으로 아버지 이경로(李敬魯)와 어머니 황주 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한성법관양성소를 제3기 졸업하고 1903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1906년 일본와세다의숙[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어머니의 갑작스런 타계로 귀국하여 시묘 살이한 효자이다. 1920년대 원삼면 사암리[현 사암리 저수지]논에 물고를 보러가서 우연히 사금(砂金)을 발견하여 금맥을 찿아 금광업을 시작하게 되엇다.

광산에 전기가 필요함에 전기를 설치하니 오지인 원삼면 주민들에게도 전기의 혜택을 받게 하였다. 이 후 금광은 사암리, 고당리 등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1930년대 중반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생활이 어려운 이들을 규휼하며 가뭄으로 인해 세금을 못 내자 면민 모두의 세금을 내어주는 선행을 베풀었다. 또, 1941년 좌전에서 사암리까지 자동차 도로를 개설하여 원삼면 교통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30년대 사암리사전강습소를 개설하여 아동들을 무료로 교육하였는가 하면, 광복 후 원삼초등학교 후원회장을 맡으면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하고 1940년대 현 원삼중학교의 전신인 원삼고등공민학교를 설립, 교장을 역임하면서 원삼면 교육발전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한촉성회 원삼지부장을 역임하였다.

[묘소]

용인시 처인구 해곡동 양산에 있다.

[참고문헌]
  • 『원삼면지』(용인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2005)
  • 아들 이종문이 기록한 이명세의 약력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10.22 활동사항 수정 2012년 증보사업
이용자 의견
심** 이건 아니죠..어떻게 이분한테 불리한 사항은 쏙 빼고 기록했을까요?
의도가 뭡니까?
이 양반..반민족친일행위자 704인 명단에 올라있죠, 또 이승만 친독재 노선에 부역한 행적은 왜 삤는지 해명바랍니다.
  • 답변
  • 디지털용인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의 의견을 검토하였으나 동명이인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친일행위자인 이명세와는 자와 호가 모두 다릅니다. 귀하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 자료를 제시해 주시면 면밀히 검토하겠으나, 정확한 사실 관계 확인 없이 해명을 요구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2019.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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