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파리장서를 초안한 유림단 대표 회당 장석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3E020202
분야 지리
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기산면 각산1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이순하

장석영(張錫英)은 1851년 10월 24일 조상 대대의 세거지인 칠곡군 약목면 각산동에서 참판을 역임한 장시표의 아들로 출생하여 1926년 6월 8일 향년 76세로 졸하였다.

자는 순화(舜華) 또는 중범(仲範)이며, 호는 회당(晦堂)이나 처음에는 추관(秋觀)이라 하였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을 스승으로 모신 장석영은, 이진상의 이른바 성리학(性理學)과 주리설(主理說)의 정통을 연구하여 고제(高第: 학식과 품행이 우수한 제자)의 1인으로 지목 받았다. 이진상의 많은 제자 중에 특히 유명한 인물로는, 학문적 명망이 높아서 의정부참찬까지 지낸 면우 곽종석이진상의 외아들로서 학통을 이은 대계 이승희가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과 병칭되어 3인의 제자로 정립되는 인물이 바로 회당이라 할 수 있다. 이 세 사람은 나이도 비슷하여, 서로가 평생을 자별하게 지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항일독립운동에서도 대개 비슷한 노선을 취하였다.

장석영은 1905년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체결소식을 듣고, 이승희·곽종석과 함께 영남 유생 300여 명을 규합하여 조약 파기와 오적(五賊) 처단을 요구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䟽)」를 올리며 항일항쟁을 시작하였다. 그 후 1907년에 전국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칠곡 지방의 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된 바도 있으며, 여러 가지 항일결사가 있을 때마다 자주 회장 등에 추대되는 등 올곧은 항일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국운이 더욱 기울어져 1907년 7월에 정미 7조약이 체결되고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는 비운이 겹치자 학문적 도반이자 정치적 동반자인 이승희가 시베리아의 브라디보스토크로 떠나 해외에서의 항일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2년 1월 회당은 만주로 가서 이승희를 만났다. 당시 이승희는 만주의 밀산부에서 이상설과 같이 한흥동을 건설하여 해외독립운동의 기지를 닦고 있었는데, 장석영 선생은 수년간의 상거의 회포를 풀면서 동시에 이승희로 하여금 망명지를 서간도로 옮기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당시 130여 일에 걸쳐 기록된 장석영의 「요좌기행(遼左紀行)」은, 일제에 의한 민족수난기에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한 해외 활동지가 되었던 남북 만주와 시베리아 지방을 직접 답사하여 목도한 사실을 기록한 희귀한 자료로서, 만주 지방의 독립운동사 연구에 귀장한 사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경상남도 거창의 곽종석과 성주의 송준필·김창숙 등 유림인사들은 영남의 양반유생을 규합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내기로 계획을 세웠다. 당시 김창숙은 독립청원서의 문안을 작성하는 문제로 곽종석을 찾아갔다. 곽종석김창숙을 반갑게 맞으면서, “이제 전국의 유림을 일으켜 우리의 대의를 세계만방에 천명케 되었으니, 곧 이 몸이 죽을 곳을 얻은 것”이라면서, 독립청원서 문안을 회당 장석영에게 부탁했으니 가서 찾으라고 하였다.

김창숙이 그길로 장석영을 찾아가 문안을 요구하자, 장석영은 문안 원문은 이미 곽종석에게 보냈다고 하면서 사본 1통을 내어주었다. 그리하여 김창숙이 다시 곽종석을 찾아가 미흡한 점을 보완하여 작성한 것이 바로 파리장서이다. 이 장서에 서명한 유생은 137명이나 된다. 이렇게 작성된 파리장서를 발송하기 위하여 김창숙은 통역으로 박돈서를 대동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파리까지 가려 했으나, 여건이 미비하다는(여비와 프랑스어 통역이 필요) 동지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파리에 주재하고 있는 김규식에게 우송하여 독립청원서를 직접 평화회의에 제출토록 하고, 청원서 원문을 영어·독어·불어·중국어 등 4개 국어로 번역하여 수천 부를 인쇄했다.

당시 김창숙김규식에게뿐만 아니라 세계 각 기관과 언론계 그리고 국내 각지의 향교에 파리장서를 원문 그대로 직접 우송하였다. 이로써 파리장서 내용이 국내의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국제적으로도 한국 유림단의 거사가 대대적으로 발표되었다.

파리장서는, 한국이 불행히도 일제의 잔악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 있어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이 있으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실현코자 하는 민족자결 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게도 자주독립을 보장해 줄 것을 국제 여론에 호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해 4월 파리장서사건의 전모가 일제의 관헌에게 발각되어 주동자 전원은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 수감된 지 한 달 후인 5월 15일 공판에서 곽종석장석영은 2년, 송준필은 1년 반, 성대식은 1년의 징역이 각각 구형되었으며, 5일 후인 20일에 그대로 언도되었다.

그런데 구금 및 공판 과정에서 파리장서사건 주동자들이 보여준 당당한 태도는 재판기록문과 옥중실기를 통하여 후세에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당시 일제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장석영·송준필·성대식 등은 1919년 3월 중 유생의 연명으로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조선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고, 그 조선전도의 유생에 대하여 독립운동을 촉성하도록 통문을 발송할 것을 협의하고, 장석영 외 1명이 강화회의에 제출할 문안을 기초하고 또 장석영·송준필이 유생에 대한 통문을 기초하여 동지사의 찬성을 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 장충공원에 있는 ‘한국유림단독립운동파리장서비’는,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유림대표 137인의 항일운동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국민들의 거족적인 성원으로 1973년 10월에 세워진 것이다.

[정보제공]

  • •  장인희(남, 각산1리 거주)
  • •  장상진(향토사학자)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