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D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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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3·4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순하 |
하귀댁 할머니는 밀양이 고향이다. 따라서 택호는 밀양댁이어야 하지만 같은 동네에 사는 큰올케가 이미 밀양댁으로 불리고 있었기에 하귀댁으로 불린단다. 고향이 밀양 하귀동[정확한 명칭은 아닌 것으로 밝혀짐]이었던 할머니는 자신보다 네 살이 많고 시누이가 셋이나 되는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오게 된다. 열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할머니가 시집 올 때는 상답에 검정고무신을 넣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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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는 하귀댁 할머니-하귀댁 할머니 모습
“우리 시집오는데 그 집이 장가들인다고 검정고무신 상답에 넣었거든. 나무 아닙니까? 이래 못 받고 못 받고 해서 끄실(끌)고 다니요. 이래 자꾸 비틀어지니까(닳아서) 끈이 똑 끊어져서, 앞도 없고 (나무)끈만 걸쳐져 있는 거라.”
그 검정고무신을 신다가 떨어지면 나무로 만든 끈을 대어 닳을 때까지 그것을 신고 또 신었다고 한다.
하귀댁 할머니는 시아버지가 여든여덟 살로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살았다. 시집 온 후 몇 년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홀로 남겨진 시아버지를 봉양하며 그렇게 평생을 살았다고. 할머니께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효도 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처럼 모시고 살았다.”고 대답하셨다.
하귀댁 할머니 시어머니는 2월 초하루부터 초사흗날까지 정지(부엌)에서 영등할머니를 모셨다고 한다.
웃갓마을에서는 2월에 비가 오면 ‘영동할머니가 며느리를 데리고 온다’며 좋은 날을 받아 혼인을 시키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또 시월에는 떡 한 시루를 해 정지(부엌)에서 고사를 지낸 후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었다.
그렇듯 전통을 지켜오던 시어머니에게 천석꾼의 딸 하귀댁 할머니는 천덕꾸러기였다고 한다. “아, 나도 시어머니한테 많이 받았어(혼이 많이 났어). 내가 좀 그(과)하게 하면, 부잣집 딸 몸서리난다 하고, 불 많이 때면 시아버지 골빼먹는다(골병들게 한다) 하고.”
하귀댁 할머니는 시어머니와 시누이 시집살이뿐만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안 해 본 농사 없이 모두 지어 보았다고 한다. 제일 힘들었다는 질쌈(길쌈의 방언)과 비단 짜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벼농사는 기본으로 지었으며, 미나리깡(미나리꽝의 방언)이며 오이며 수박 등의 특수작물 등 여러 밭농사도 지었다.
그러나 고된 노동과 시집살이보다 힘들었던 것은 자식을 키우는 일이었다. 7남매를 둔 할머니는 아들 둘과 딸 셋을 키우다 아들 한 명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 하귀댁 할머니는 애써 슬픔을 감추며 “피난 가기 전에 낳아 피난 갔다 온 후 홍진으로 아들 하나를 치웠다.”며 씁쓸하게 웃으셨다.
피난을 다녀온 후 할머니는 마을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을 집에 숨겨주었는데 그때 홍진에 걸린 피난민에게 옮은 것 같다며, “홍진에는 메주가 좋지 않은데 그것도 모르고 방에 메주를 달아 놓고 해서 그렇게 된 것 같다.”며 마치 본인 때문에 아들을 저세상에 보낸 것처럼 말씀하셨다. “아들을 낳고 금줄도 치고 얼마나 좋아했었다고…….” 하시며 당시를 회상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고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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