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D02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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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3·4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순하 |
광주이씨의 시조는 이당(李唐)이다. 이당은 고려 후기 경기도 광주관아의 아전이었는데, 모시고 있는 태수 인화이씨의 사위가 된 뒤 생원시에 합격했다. 400년 아전 가문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사족(士族)으로 전환한 것이다. 광주이씨 문중에서는 이당이 신라시대 칠원성 호족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당을 시조로 하는 광주이씨 외에 두문동 72현 이양중을 시조로 하는 광주이씨도 있다. 이양중은 길재와 이색, 정몽주, 이방원 등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당은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그중 차남이 유학자이자 은둔시인으로 알려진 둔촌(遁村) 이집(李集)[1327~1387]이다. 이집은 공민왕의 신진 사대부 양성에 따라 활약한 정몽주, 이색, 이숭인들과 동시대인으로 이들과 교유하였다.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났던 둔촌은 1368년(공민왕 17) 국정을 독단하는 승려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노부를 모시고 사간(司諫)직 동료인 경상도 영천 최원도의 집으로 도피하여 3년여 간 숨어살았다. 신돈이 실각한 후 개경으로 돌아간 둔촌은 정3품인 판전교시사를 지냈다.
그 후 둔촌이 한양[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에 낙향해서 살고 있는데, 포은 정몽주가 둔촌을 찾아왔다. 둔촌은 포은 보다 열 살 위였다. 당시 왕을 갈아치우려는 왕조 교체의 거대한 음모가 진행 중임을 조준과 하륜, 정도전의 움직임으로 직감한 포은이 답답하여 둔촌을 찾아가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전년도의 일이었다.
그러나 둔촌의 아들과 손자들은 모두 신왕조(조선)에 과감히 참여해 사환(仕宦)의 길로 들어섰으며, 세조 이후에는 다섯 명의 정승과 여섯 명의 판서, 일곱 명의 공신을 배출하여 훈구가문으로 절정을 이룬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광주목과 여주목 인물조에 소개되고 있는 이지직, 이지강, 이지유, 이장손, 이인손, 이예손, 이극배, 이극감, 이극중, 이극균, 이세필, 이세광, 이세우, 이세좌 등이 둔촌파 자손이다.
둔촌의 세 아들 이지직(之直)은 참의, 차남 이지강(之剛)은 예조판서, 이지유(之柔)는 목사를 지냈다. 이지직은 장손·인손·예손 등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인손(仁孫)은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게 되자 호조판서에 승진되고,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인손의 아들 5형제 중 극배(克培)는 세조 때 공신으로, 성종 때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극감(克堪)은 광성군, 극증(克增)은 광천군, 극돈(克墩)은 5도 관찰사와 3조 판서를 거쳐 좌찬성과 우찬성을 지냈으며, 김일손을 비롯한 영남 출신 신진사림파의 많은 학자들이 제거되는 무오사화를 주동했다. 극균(克均)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선전관이 되고 연산군 때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들은 주로 오늘의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과 하대원에 거주하였는데, 당대에 이름을 떨쳐 이들이 살던 곳을 ‘오극(五克)골’이라고 불렀다.
이렇듯 이인손의 자손 대부터 세조~성종 대 영의정이 셋이나 나오는 등 명재상과 정승, 문무과 급제자들이 배출되면서 광주이씨 가문은 크게 창성(昌盛)했으나, 연산군의 생모 윤비 폐출사건(갑자사화)에 연루되면서 8극 10여 명의 종반들이 참화를 입게 된다.
이인손의 후손 중 명재상으로 꼽히는 이준경(李浚慶)[1499~1572]은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정치권력이 옮겨 가는 과도기에 사림정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1565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1572년(선조 5) 국가 경영에 관하여 4가지 조목으로 된 유소(遺疏)를 올리고 죽었다. 그중 붕당(朋黨)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가가 난국에 빠질 것이라는 내용은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이이(李珥) 등 신진 사류들은 이를 격렬히 부정하면서 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나 이 예언은 몇 년 후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현실화되었다. 한음 이덕형(李德馨)[1561~1613]은 선조 대에 좌의정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 원병외교를 성공시켰다.
이예손의 차남이 광주이씨 칠곡 입향조 이지[승사랑공파, 일명 칠곡파]의 아버지 이극견이다. 인손의 후손이 훈구가문으로 성장한 반면, 예손의 후손은 주로 사림의 길로 들어서 조선 중기에 높은 관직에 오른다.
광주이씨를 영남의 대표적인 남인 문벌로 만든 이는 이지의 현손(손자의 손자) 대에 태어난 성리학자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이다. 석담 선생은 아버지의 임지였던 칠곡에 정착한 이래 광주이씨를 양반가로 일으킨 중흥조이다.
석담 선생은 도장(道長), 도장(道章) 두 아들을 데리고 웃갓마을로 이거했으며, 그 뒤 원지(元祉)는 다시 상지로 옮겨갔고, 원례(元禮)의 후손들은 경북 봉화 부근으로 이거하였으며, 원정(元禎)은 양주목사 재직 중 신기제택(新基第宅)으로부터 귀바위[일명 이암(耳巖)]로 이거하였다. 그리고 매원은 원록(元祿)과 감호당(鑑湖堂) 도장공(道章公) 후손이 주로 거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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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담종파 종갓집 본채와 불천위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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