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B03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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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순하 |
어느 마을에나 있을 법한 조그마한 구멍가게, 현재 다부 IC와 다부동전적기념관을 배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아래 간판은 없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담뱃집으로 통하는 그곳에서 부동댁으로 불리는 조남희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생기면서 옛집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조남희 씨는 지금도 옛집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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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전적기념관 준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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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전적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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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전적기념관
“지금 우리 집 있는 그 뒤짝(쪽)으로 있는 논이 넘(다른 사람) 논이라카이. 겨울 되면 물 많이 있는 논이어서 애들이 겨울이면 스키 탄다고…… 그렇게 놀아도 춥지를 않애. 애들 거기 가서 양말 다 빠지고 옷 다 빠지고 놀았던 곳이거든. 그래가 저기다(논) 집을 지었으니 다 숨겨졌지(논이 없어졌다는 의미임). 애들 거가 다 놀이터였는데…….”
올해 나이 68세인 조남희 씨는 다부동이 고향이다. 다부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칠곡군 동천동[현 대구광역시 동천동]으로 시집을 갔다. 그리고 1970년에 시부모와 남편, 아이들과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 담뱃가게를 인수하여 운영해 오다 2008년 4월에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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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는 조남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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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는 조남희 씨
그녀에게 시집가기 전의 ‘옛날 이야기’를 부탁했더니 제일 먼저 꺼낸 이야기가 한국전쟁 때 피난을 간 이야기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그녀의 나이 열 살 때 일어났던 일들을 그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열 살 먹었을 적에 피난은 우리가 여기서 대구로 안 나가고…… (중략) ……재를 넘어가 거기서 자고 했는데 ‘산손님 나온다’ 그러더라구요. 인민군이 온 거지. 그때 사람들이 빨갱이 나온다 해가 우리는 그 사람들이 빨간 줄 알았거든요. 그래 또 피난을 갔어요. 어두운 데 가니깐 이래 낭떠러지 밑으로 애들하고 어른하고 손 붙잡고 가다가 미끄러져 굴러 떨어지는 것도 붙들어 올리고…….”
정확한 날짜까지는 기억하지 못했으나, 그녀가 피난을 간 시기는 모를 심은 후인 6월쯤이었으며, 피난 기간은 대략 2개월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마을에는 파출소와 면사무소가 있었는데, 직원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피난을 가도록 지시하여 다부동전투가 시작되기 전 마을 사람 모두가 피난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생생했던 상황을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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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출소(지소)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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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무소 자리
“할머니 한 분이 말을 하데(하길) 제트기 한 대가 하여튼 처마 안쪽(까지) 사람 있는 것까지 다 살피고 들어갔대요. 피난은 대구 가서 하고 요(다부동) 왔는데 오니깐 전쟁 뒤라노니(후라서) 우리 집에는 작은 방을 늘라 놨는데(넓혀 놓았는데) 그 방에다가 이북 장교들이 짚을 치고 말을 몰아 넣어놨더라고. 말을 타고 다녔다대. 그러니깐 그 짚 바로 뒤 안에다가 포탄이 떨어져가 집이 좀 기울어졌더라고, (마을의 집들이) 다 탔어요. 5채를 제외하고.”
그 해 8월 부모님과 네 남매가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 때는 피난을 갔던 마을 사람들이 이미 마을에 돌아와 있었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이 남기고 간 흔적은 처참했고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이를 수습하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불에 타거나 포탄에 맞아 없어진 집들을 움막과 같은 형태로 임시 복구하여 생활하며 길이나 논 등에 난 포탄 자국을 메우는 작업도 함께 해나가야 했으니, 그 고생을 어떻게 다 말로 할 수 있겠느냐고 조남희 씨는 필자에게 되물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