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B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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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재술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기습남침을 감행했던 북한군은 무인지경을 헤쳐 내려오듯 이 나라 이 강토를 휩쓸며 내려오다 그해 7월 말경 낙동강 주변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제 국군과 유엔군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 방어선은 낙동강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최종적으로 저지 격멸하고 반격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그리하여 그해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대구를 지키기 위한 55일간의 결사항전이 이곳 다부동 전선에서 벌어졌다.
당시 워커 장군은 이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선이 위태로울 때마다 “Stand or die!"를 외쳤다고 한다. 지키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이다. 이는 말 그대로 낙동강을 죽음으로써 지키자는 비장한 결의라 할 수 있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이처럼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결사 항전했다. 왜 그랬을까? 그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낙동강 방어선은 그만큼 정치적, 전략적, 전술적으로 대단히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정치적으로 이곳이 무너지면 대구를 포함한 부산을 잃게 된다. 그러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 불을 보듯 분명해진다. 이 전선이 붕괴될 경우 더 이상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전략적으로 이곳에 배수의 진을 침으로써 장병들에게 전투 의지를 부여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외곽의 방어선 유지가 용이한 곳이라는 이유도 빼놓을 수 없었다. 더구나 부산을 기점으로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어 기동화된 예비대를 전투지역에 신속히 투입, 집중 운용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방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술적으로는 이미 해상은 미 해군이 완전하게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섭(渡涉)이 불가능한 낙동강이라는 장애물을 이용하여, 이선 전방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 격멸할 수 있는 유리한 지형을 확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낙동강 전선은 마산의 진동리로부터 왜관, 영덕을 잇는 80㎞의 대장정이었다. 이중 대구를 경유 부산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지역에 국군 제1사단이 배치되었고 그 서쪽에는 미 제1기병사단이 현풍에서 왜관 서쪽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동쪽에는 국군 제6사단이 낙동리에서 안동 서쪽까지 각각 배치되어 방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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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뭄으로 인하여 낙동강 수심이 얕아 일부 지역이 도섭(渡涉) 가능하고 방어 전선이 너무 넓어 부대 간격이 발생하는 등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그리하여 육군은 8월 11일부로 축소된 방어선인 왜관 북방의 303고지-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방어선으로 이동하여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은 강변 전투를 종결짓고 12일 야간에 철수를 개시하여 주저항선인 다부동을 중심으로 한 새 방어선으로 이동하여 진지를 구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