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A03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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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순하 |
매원마을은 예부터 마을에서 보이는 곳에는 묘를 쓸 수 없는 금장지구(禁葬地區) 풍습이 전한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광주이씨가 매원에 세거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풍습이 생겼는데, 광주이씨뿐만 아니라 타성들까지도 마을에서 보이는 곳에 묘를 쓸 수 없었다고 한다.
마을이 생성되고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금장지구는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는데, 이는 매원에 주요 세거지지(世居之地)를 둔 광주이씨의 영향이 크다.
매원이 가장 잘 보이는 소바우골에서 매원마을을 내려다보면 세월이 무색할 만큼 전통 농촌마을 형태를 그대로 고집하고 있다. 마을을 따라 고가들이 즐비해 있으며, 한국전쟁 후 복원된 가옥들 역시 새마을운동 이전에 지어진 가옥 형태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매원마을을 벗어나 마을을 축으로 360° 시선을 돌리게 되면 경부고속국도와 고속전철, 종합운동장, 물류센터, 휴게소 등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매원리의 광주이씨는 1997년부터 봉계동 산27번지 도락산에서 묘사를 지내고 있다. 매원 입향조인 이원록(李元祿)을 시작으로 15대까지의 산소를 모아 합동 묘사를 지내는 것이다. 15대까지의 산소는 모두 22상구, 22상구를 모으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이완석 씨가 말해 준다. “신동 거기 가서 신1리 앞산이 전부 우리 종산인데, 거기도 한 다섯 구 있었고, 저짝에도 다섯 구 있었고 그 제각기 흩어진 거를 묘사라고 하는 것이 1주일 걸리니깐 그 한태 모은 거야.”
그 동안 매원의 광주이씨 후손들은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묏자리를 찾아 산소를 만들었고, 지천면 신리 당골에 있는 광주이씨 종산을 비롯하여 여러 산에서 묘사를 지냈다. 그리하여 합동 묘사를 지내기 전 흩어져 있는 산소를 찾아 묘사를 지내는 데만 해도 무려 1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한 산에서 묘사를 지내는 데 걸리는 시간만 해도 4시간 이상씩 걸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광주이씨 문중에서는 묘사를 지낼 때 반드시 산신제도 함께 지냈는데, 400여 년이 넘도록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묘사와 산신제를 함께 지냈다고 한다.
묘사는 추수가 끝난 다음 음력 시월 중 날짜를 정해 무덤 앞에서 올리는 제례로, 묘제(墓祭), 시제(時祭), 시향(時享)이라고도 한다. 무덤 앞에서 제를 올리기 때문에 신위는 없고 제물은 미리 상석(床石) 위에 진설한다. 상석은 무덤 앞에 제사 음식을 차려 놓기 위해 마련해 놓은 상돌을 말한다. 제사 때 쓰는 육적과 치적 그리고 어적은 기제(忌祭) 때와 마찬가지이고, 헌작(獻酌, 종헌시에 제주는 하지 않는다) 때 각각 앞에 적과 바꾸어 올리며, 초헌(初獻) 때 독축을 하는 것은 기제 때와 같다. 행사 순서는 다례 때와 같이 유식(侑食), 고이성(告利成)은 하지 않는다.
전통의 의미가 바래고 있는 요즘, 현실에 맞추어 합동묘사를 지내기로 했다는 이들 속에서 진정한 전통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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