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8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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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宮億 |
영어음역 | Namgung Eok |
이칭/별칭 | 한서(翰西)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조선 말기 칠곡군수를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언론인.
[활동사항]
남궁억(南宮檍)[1863~1939]은 1884년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에서 영문학을 수료하고, 1889년 궁내부별군직(宮內府別軍職), 1893년 칠곡군수(漆谷郡守), 1894년 내부토목국장(內部土木局長)을 역임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1898년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사장으로 취임하여 국민계몽과 독립협회의 활동 지원,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의 한국 침략을 논박하는 사설을 실어 경무청에 구속되기도 하였다.
1905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성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에 즈음하여 사임하였다. 1906년 양양군수에 임명되어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세우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으나 1907년 정미7조약 이후 다시 사임하였다. 1907년 대한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어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8년 관동학회를 창립하고 회장이 되어 구국 교육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배화학당 교사, 1912년 상동청년학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독립 사상의 고취, 애국 가사의 보급, 한글 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8년 강원도 홍천으로 낙향하여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하고 무궁화 묘포를 조성하여 무궁화보급운동(無窮花普及運動)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으며, 나아가 애국적인 찬송가를 만들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 보급하였다. 1933년 9월 기독교 계열의 독립운동 비밀결사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 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39년 4월 77세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술에 『동사략(東史略)』, 『조선이야기』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