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3007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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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秉善 |
영어음역 | Son Byeongse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칠곡군|중국 만주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윤오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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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덕산동 569[현 덕산리] |
성별 | 남 |
생년 | 1895년 1월 12일 |
몰년 | 1942년 1월 29일 |
본관 | 밀양 |
[정의]
일제강점기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895년 1월 12일 칠곡군 약목면 덕산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 군자금을 모아 상해로 가려다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치른 후, 1925년 다시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지령서를 부호(富豪)들에게 배포하고 모금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형을 받았다.
[활동사항]
1920년 북만주(北滿洲)로 가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협의하고 돌아와, 군자금 조달책으로서 서병철(徐丙哲), 박소용(朴韶鏞) 등을 규합하여 상해 임시정부 파견원 허영원(許永元)과 함께 대구 등지에서 모금 활동을 폈다. 그러나 모금한 군자금 2천여 원을 상해로 가져 가려다 경찰에 체포되어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죄’로 1921년 2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5월 24일에는 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6월 2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면서 1925년 옥중에서 알게 된 김찬규(金燦奎), 신태식(申泰植), 신석원(申錫遠)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군무총장(軍務總長) 노백린(盧伯麟)의 군자금 모집 지령서를 경상도 내 부호들에게 보내 모금하던 중 밀양에서 체포되었다. 1926년 3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5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및 증빙인멸죄’로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