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지역의 시가와 구리를 주제로 한 작품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90024
영어공식명칭 Song in Guri and Guri Works on the Subject
분야 구비 전승·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한철수

[정의]

경기도 구리 지역 출신의 중세 문인 시가와 구리 지역을 배경으로 한 문학 작품.

[개설]

경기도 구리시는 백성의 무덤과 왕의 무덤이 동시에 있는 무덤의 도시다. 아차산 자락과 동구릉 구릉산[검암산] 자락에는 고려와 조선 시대를 풍미한 시인 묵객이 있다. 구리 지역의 역사 인물을 언급할 때, 흔히들 생거(生居)·사거(死居)·우거(寓居)로 분류한다. 생거는 우리 고장에서 태어난 사람, 우거는 잠시 혹은 오랫동안 머물면서 업적을 남기거나 작품 활동을 한 사람, 사거는 죽은 뒤 묻힌 사람을 말한다. 역사적 가치를 남긴 인물의 경우 그 인물이 거쳐 간 여러 고장에서 그 인물을 기리고 문화유산으로 여기는 경우도 많다. 여기서는 각종 서적과 문헌을 통해 재발견한 구리시를 거쳤거나 만년에 유택을 쓰고 있는 인물의 시가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고려 말 조선 초 구리 인물의 시가(詩歌)]

1. 조운흘(趙云仡)[1332~1404]: 고려 말~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 호는 석간(石磵)

(1) 「즉사(卽事)[광나루에 거처하면서 지은 시]」

시문일오환인개(柴門日午喚人開)[낮이 되니 사람 불러 사립문 열게 하고]

보출임정좌석태(步出林亭坐石苔)[임정으로 걸어 나가 석태 위에 앉는다]

작야산중풍우악(昨夜山中風雨惡)[지난밤 산중에 비바람이 거세더니]

만계유수흘화래(滿溪流水汔花來)[가득 찬 시냇물에 낙화가 흘러온다]

출전: 『용재총화(慵齋叢話)』 권 3

「즉사(卽事)」는 고려 말 조운흘이 서해도 관찰사를 그만두고 광인(狂人)처럼 살던 중 귀양을 가는 이들이 배를 타고 건너는 모습을 보고 지은 시이다.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 조운흘이 은신처인 아차산 기슭을 거닐며 지은 이 시에서는 혼돈의 세계를 지난밤의 비바람으로, 귀양을 가는 이들을 떨어지는 꽃으로 표현했다.

(2) 「기우도(騎牛圖)」

기황우방청산(騎黃牛傍靑山[황우 타고 청산을 곁하니]

추추호기신채(麤麤乎其身彩)[누추하도다 나의 풍채]

일직포야불직(一疋布也不直)[한 필의 베 값도 못하는구나]

출전: 『필원잡기(筆苑雜記)』 권 2

같은 시기 갈대 삿갓에 허름한 삼베옷을 걸쳐 입고는 황소를 타고 유유자적할 때, 조선 개국 공신이자 좌의정 벼슬에 오른 김사형이 찾아와 벼슬을 권했다. 석간이 대꾸도 않고 앉아 있자 ‘남에게 굴하지 않는 것이 늙은이의 고태(古態)인 걸 내 어찌 다시 말하리오.’ 하고 김사형이 돌아가자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지은 시이다.

(3) 「봄과 함께 보낸 사람[送春日別人]」

적환상심체루휘(謫宦傷心涕淚揮)[귀양살이 마음 아파 눈물 뿌리는데]

송인겸복송춘귀(送人兼復送春歸)[사람 보내고 또다시 봄을 보내네]

춘풍호거무유의(春風好去無留意)[봄바람 어서 가고 머무르지 마라]

구재인간학시비(久在人間學是非)[인간 세상 오래 있으면 시름만 늘어나느니라]

출전: 『동문선(東文選)』 권 22

「봄과 함께 보낸 사람[送春日別人]」는 칠언 절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노사신·서거정·강희맹 등 23명의 문장가가 엮은 『동문선(東文選)』 권 22에 전한다. 아차산 아래 초막 생활 동안 자연을 매개로 지은 이 작품에는 여말 선초 현실 참여와 은둔 사이에서 고민하는 석간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2. 홍응(洪應)[1428~1492]: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응지(應之), 호는 휴휴당(休休堂), 65세에 죽어 구리시 아천동 아치울에 장사 지냈다.

(1) 「진후주첩(陳後主帖)」

걸각쟁영망약신(傑閣崢嶸望若神)[누각은 크고 높아 신선을 보는 듯]

후정가무취훈훈(後庭歌舞醉醺醺)[후정화의 춤과 취흥을 돋우네]

문전파견한금호(門前怕見韓擒虎)[문 앞의 한금호를 두려워하여]

정저회간량귀인(井底回看兩貴人)[우물 안에 숨어서 두 여인을 보네]

출전: 『진후주첩(陳後主帖)』 중 홍응의 시

1475년(성종 6) 11월 27일에 성종이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김수온, 임원준, 허종, 서거정, 성임 등 여덟 명에게 경계할 만한 제왕들의 악정을 찾아 그 내용으로 두 편씩 열여섯 편의 글을 지어 바치게 했다. 홍응은 두 편의 글을 지어 바쳤다. 진나라 후주(後主)가 주색에 빠져 사치스런 누각을 짓고 날마다 비빈(妃嬪)과 놀면서 시를 지어 주고받은 것을 모아 가곡(歌曲)으로 꾸민 것이 후정화(後庭花)이다. 이토록 주색잡기에 몰두해 있던 후주는 수나라가 침범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수나라 장수 한금호가 누각에 도착하자 후주가 공비(孔妃)·장비(張妃)와 함께 우물에 숨었다가 잡힌 사건을 시로 표현한 작품이 「진후주첩(陳後主帖)」이다.

(2) 「당장종첩(唐莊宗帖)」

남면엄위자면류(南面嚴威自冕旒)[임금의 위엄은 면류관을 쓰는 데 있거늘]

여하도분혼령우(如何塗粉混伶優)[어찌하여 분 바르고 광대 속에 섞였는가]

단령류후시상소(但令劉后時相笑)[유후와 서로 웃을 때에 뺨 맞은]

비협녕지만고수(批頰寧知萬古羞)[만고의 수치를 어찌 알았으리]

출전: 『당장종첩』 중 홍응의 시

이 글은 「진후주첩(陳後主帖)」과 마찬가지로 성종의 명에 의해 지은 열여섯 편의 글 중 하나이다. 당나라 장종(莊宗)이 어려서부터 광대를 총애하며 항상 옆에 두고 보기를 즐거워했다. 왕후인 유후(劉后)를 즐겁게 하기 위해 광대 복장을 하고 스스로 분을 바르고 광대들과 섞여 궁중에서 뺨까지 맞았음을 희롱하며 적은 글이다.

3. 신종호(申從濩)[1456~1497]: 조선 초기 문신, 자는 차소(次韶), 호는 삼괴당(三魁堂), 구리시 아천동 동삿골에 묻혔다.

(1) 「상춘(傷春) 1」

다구음파수초성(茶甌飮罷睡初醒)[차 끓여 마신 뒤에 졸음이 가벼울 제]

격옥문취자옥생(隔屋聞吹紫玉笙)[부러운 옥피리 소리 담을 격해 들리누나]

연자불래앵우거(燕子不來鶯又去)[제비도 오지 않고 꾀꼬리마저 가 버린]

만정홍우락무성(滿庭紅雨落無聲)[뜰에 가득 찬 붉은 꽃비는 소리 없이 지는구나]

(2) 「상춘(傷春) 2」

분장서면석양홍(粉墻西面夕陽紅)[예쁘게 칠한 서쪽 담장에 석양이 붉고]

비서분분박마종(飛絮紛紛撲馬鬃)[버들개지 어지러이 날려 말갈기를 치는구나]

몽리소화수리과(夢裏韶華愁裏過)[꿈속의 좋은 시절은 시름 속에 지나가고]

일년춘사련화풍(一年春事楝花風)[한 해의 봄 경치 개나리 바람에 곱구나]

「상춘(傷春) 1」, 「상춘(傷春) 2」는 봄을 보내는 아쉬움을 가슴 시리게 읊은 작품이다. 봄이 오면 만물들은 활기차게 움직인다. 인간들도 이에 덩달아 나그네가 되어 봄나들이를 한다. 그러나 삼괴당은 1수에서는 십일홍을, 2수에서는 버들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쉬 가는 청춘으로 비유했다. 빨리 지나가는 봄날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절창으로 꼽힌다.

[조선 중후기 구리 인물의 시가]

1. 아차산인(峨嵯山人) 신잠(申潛)[1491~1554]: 조선 전기의 문신·문인,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아차산인(峨嵯山人), 구리시 아천동 동삿골에 묻혔다.

(1) 「취제이화정(醉題梨花亭)」

차지래유삼십춘(此地來遊三十春)[이곳에 와서 놀던 그날 어느 사이 30년이 지났고]

우심진적총상신(偊尋陣迹摠像神)[우연히 옛 자리 찾으니 쓸쓸한 마음 절로 상하는구나]

정전지유이화수(庭前只有梨花樹)[정자 없는 뜰 앞에는 배꽃나무만 남아 있고]

불견당시가무인(不見當時歌舞人)[가무하던 그 사람들 찾아 볼 길 없구나]

도성 동산(東山)에 해당하는 낙산(落山) 아래 깨끗한 수석과 무성한 수림에서 신잠(申潛)은 지은 취제이화정(醉題梨花亭)[이화정에 취하여]라는 시(詩)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했다. 이 시로 보아 낙산 아래 이화동은 배 밭이 많아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

(2) 「아차산에 은거하며 쓴 시」

홍지기실백패실(紅脂己失白牌失)[홍지는 회수되고 백패는 잃어버렸으니]

장원진사총허명(壯元進士摠虛名)[진사시의 장원 또한 헛 이름일세]

귀거아차산하주(歸去峨嵯山下住)[돌아와 아차산 밑에 사니]

산인이자숙능쟁(山人二字孰能爭)[산인이란 두 글자야 누가 다툴꼬]

이 시는 신잠이 중종 때 진사에 장원 급제한 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을 당하고 아차산 아래 별당을 짓고 기거하면서 지은 시이다.

2. 채유후(蔡裕後)[1599~166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湖洲),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묘는 구리시 사노동 안말에 있다.

「다나 쓰나 이 탁주(濁酒) 됴코」

다나 쓰나 이 탁주 됴코 대테 메온 질병들이 더욱 됴하[달거나 쓰거나 쌀로 만든 술이 좋고 참대로 테를 두른 질병들이 (탁주를 담기에는) 더욱 좋도다]

아룬자 박(朴) 구기를 중지 둥둥 띄여 두고[얼씨구, 표주박으로 만든 국자를 술통에 둥둥 띄워 놓고 마시는데]

아희야 저리 침채일 만졍 업다 말고 내여라[아이야, 절인 김치라도 좋으니 안주 없다 말고 내어 오너라]

채유후는 조선 시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였고, 세 차례나 실록 편찬을 맡을 정도로 빼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채유후가 정승의 벼슬에 오르지 못한 것 또한 술 때문이다. 채유후는 여러 차례 술 때문에 좌천되거나 쉬기도 했다. 이 시조에서 채유후의 술을 대하는 태도가 잘 보인다. “세사(世事)는 금삼척(琴三尺)이요 생애(生涯)는 주일배(酒一盃)라”는 말이 있다. 세상일은 거문고를, 생애는 술 한 잔이라는 뜻이다. 선인들은 예부터 이렇게 술을 즐겨 왔다. 그래서 취흥을 중시하고 술을 망아의 선약으로 여겼다. 이 시조에서 채유후는 채근한다. 청탁을 불문하고 술이 준비됐으니 어서 마시자고. 그저 평상에 둘러앉아 대나무 통에 표주박 얹고 김치가 익었던 설익었던 술잔이나 나누자고 한다.

[셋, 구리 지역을 주제로 한 근래의 문학 작품]

1. 소설가 오영수의 소설에 보인 구리시

“청량리에서 버스로 이십 분, 망우리 고개를 넘어서면 교문리(橋門里)라는 조그만 한길 갓 동네가 있다. 여기에서 동남간으로 십오 분쯤 가면 장자못이라는 큰 늪이 있다. 서울 근교로서는 가장 가깝고, 어족 자원이 풍부하기로 소문난 낚시터이다. 다만 너무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에 어지럽도록 천렵꾼들이 모여드는 것이 탈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서정 소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월주(月洲) 오영수(吳永壽)[1914~1979]의 단편 소설 『장자늪』의 도입 부분이다. 오영수의 대표작으로 손꼽는 중편 소설 『수련(睡蓮)』이 1965년에 발표되었고, 같은 장소에 대한 글임을 감안할 때 『장자늪』은 1960년대 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1980년대 초까지 장자못[장자늪]은 낚시터의 구실뿐만 아니라 수택 3동 벌말 일대와 수택 2동 수늪 마을에 이르기까지 농수로로서 역할이 컸다. 오영수의 『장자늪』에는 낚시를 즐기던 작가와 교문 1동 이문안에 거주하는 노인이 '두만'이란 사람의 이야기로 한낮 낚시터의 지루함을 달랜다. 불교적 권선징악의 교훈이 담긴 전설을 풀어 나간다. 주인공은 낚시꾼이 아닌 마을 사람 두만이다.

“그날도 교문리 장자늪 낚시터가 복잡하여… 동북으로 반 마장쯤 떨어진 뱀못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련(睡蓮)』의 도입부다. 동행자 B와 세련된 복장에 선글라스를 낀 여인과의 애틋한 사랑이 이야기의 큰 줄기이다. 『수련』과 『장자늪』은 1960대 초반의 구리시의 일상과 장자못 주변의 자잘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수련』의 ‘뱀못’은 '수늪'의 다른 이름이다. 장자못은 전설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좌대가 있었을 정도로 많은 강태공들이 즐겨 찾던 명소였고, 오영수의 손에서 두 편의 소설 속 배경으로 나왔다.

2. 시조 작가 이병기와 김오남이 본 아차산

아차산액깨산[구리시], 망우산[서울시 중랑구], 용마산[서울시 광진구] 등으로 일컫는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그 명칭을 다르게 부른다. 구리시 토박이는 이 산을 액께산이라 부른다. 아차산을 주제로 한 노래는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1891∼1968]와 시인 김상용(金尙鎔) [1902∼1951]의 여동생 김오남(金午男)[1906∼1996] 등이 지은 시조가 대표작이라 하겠다.

(1) 아차산-이병기

고개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섭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 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출전: 『가람 시조집』(1939)

(2) 망우리-김오남

비인손 태어났고 빈손으로 떠났고나/ 평생에 시달리다 울며 감이 자연이냐/ 마음은 천애에 띄어 허무경을 밟노라// 죽노라 애들 썼오 울멍줄멍 저 무덤이/ 한 많든 그 심경을 뉘 맡기고 갔단 말요/ 찾아도 자최 없으니 허공만 남는구료

출전: 『자유 문학』(195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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