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81004
한자 民俗
영어공식명칭 Folklore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덕묵

[정의]

경기도 구리시 민간에서 전승되는 생활 풍속.

[개설]

민속은 민중에 의해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온 유형과 무형의 전통적·보편적 문화를 말한다. 즉, 인간이 일상의 삶에서 영위하는 생활문화를 말하며, 의식주 생활, 신앙 및 의례 생활, 놀이 및 여가 생활, 생업 및 사회생활 등이 주축이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유리 이사금 조(儒理尼斯今條)'에 "민속이 환강하여 처음으로 도솔가를 지어 부르니 이것이 가악의 시초다."라는 내용에서 '민속'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이후 『삼국유사(三國遺事)』·『성호사설(星湖僿說)』·『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등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민속에 관한 자료가 나타났다.

[구리시 생태 환경]

과거에 경기도 구리시 일대는 홍수의 피해가 심한 농경지가 많았다. 특히 지금의 갈매동·사노동·교문동은 전형적인 농경지인데, 한강 변에 위치하여 홍수의 피해가 많았다. 한강의 제방이 완공된 이후에는 더욱 안정된 농경지를 이용했으며, 1970~1980년대에 비닐하우스가 보급되면서 환금 작물인 야채를 시설 재배하여 가까운 서울의 시장으로 판매하면서 농가 소득도 높아지고 인구도 증가하였다. 비닐하우스에서는 주로 아욱·상추·쑥갓·파·고추 등이 재배된다. 예전 주민들은 서울의 청량리·왕십리·동대문으로 땔감이나 새끼 등을 팔러 다녔고, 우시장으로는 동대문 소장과 덕소, 마석 우장을 이용하였다.

[구리시 마을 신앙]

마을 신앙은 산신·서낭·부군 등의 신격이 보이나 산신이 가장 일반적으로 모셔지는 신격이다. 특히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이나 동구릉이 있는 산 주변의 마을에서는 지금도 산치성이 성행하고 있다. 과거에는 도당굿이 성행하였는데, 구리시의 대표적 도당굿인 갈매동 도당굿은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가신 신앙으로는 성주·칠성·터주·업 등 다양한 신격이 모셔지는데, 터줏가리나 업을 모신 업가리가 적지 않게 조사되었다. 경기도 구리시의 마을 신앙과 가신 신앙은 경기도 내륙 지역의 일반적인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구리시의 일생 의례는 서울 지역과 인접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장례 때 달구질의 경우는 구리시 내에서도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를 중심으로 차이가 보인다. 아차산을 따라 입지하고 있는 경춘 국도의 남쪽인 구리시 아천동교문동, 북쪽인 동구릉이 있는 인창동갈매동 지역은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교문동 일대는 장사를 지낼 때 달구질을 광중 안에 들어가 단단하게 밟는데 비하여, 갈매동 지역은 차마 부모님을 묻고 밟을 수 없다고 하여 광중 밖에서 형식적으로 밟는다.

[구리시 민속 놀이]

경기도 구리시에서 예전부터 전승되는 민속놀이는 주로 정월과 대보름에 밀집되어 있다. 왜냐하면 농한기인 이 시기가 지나면 한가하게 놀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리시에서는 대보름에 달집 태우기와 같은 형식이 축제화되지는 못했다. 경기도 광주 지역이나 용인 지역에서 동홰[동화] 놀이 등이 크게 번성하였던 것과 비교된다.

민속놀이에서는 댁겨 놀이, 오곡밥과 가장(假裝) 놀이, 박첨지 놀이, 종지 돌리기 등이 정월에 놀던 놀이로 주목된다. 댁겨 놀이는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에 댁겨하는 날이라고 별도로 날을 잡아 마을 사람들이 하던 놀이이다. 넓은 마당에 높은 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 삼현 육각에 맞추어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놀이를 하고 무대 아래에서는 2~3층 높이로 무동을 섰다. 이렇게 무동 서는 것을 ‘댓겨춤’이라고 했다. 남자가 여복으로 가장하고 춤을 추며 장구를 치고 호적을 불면서 풍악을 울렸다. 한쪽 옆으로는 천막을 쳐 두고 인근 마을 사람들이 구경을 오면 술대접을 하였다. 댁겨 놀이는 남사당패 놀이와 유사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직접 참여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며, 특히 일제 강점기 전에 동창 마을에서 성행하였다. 오곡밥 얻어 먹기와 기장 놀이는 정월 14일에 하던 놀이이다. 정월 14일은 여자날이라고 하여 부인들끼리 모여 밤늦도록 놀았다. 저녁 이른 시간에 오곡밥을 지어 먹고 밤에 부인들 여럿이 모여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오곡밥을 얻어 먹는 장난을 쳤다. 부인이 처녀처럼 꾸미기도 하였고, 바지저고리를 입고 남장을 하기도 하였으며, 거지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 먹었다. 품바 타령을 잘하는 부인이 앞장을 섰는데, 이때 양동이나 깡통을 악기 삼아 두드리며 다녔다. 박첨지 놀이도 정월 14일에 부인들이 하던 놀이이다. 박첨지가 될 사람이 높은 다락에서 발만 보이게 내놓고 걸터앉는다. 발가락 사이에는 막대기를 꽂아 저고리를 입히고 검은 천을 싼 후 모자를 씌워 사람 머리 모양을 꾸며서 박첨지를 만든다. 이리저리 발을 흔들면서 놀면 다른 부인들은 방바닥에 앉아 다락을 쳐다보며 발 놀리는 구경을 한다. 정월 14일에 여자들은 방 안에서 종지 돌리기도 많이 하였다. 다리를 오무려 세운 채 둥글게 원을 만들어 앉고 술래는 원 가운데 서 있는다. 놀이꾼들이 치마 밑으로 오무려 세운 다리 아래로 옆 사람이 준 종지를 받아 다시 옆 사람에게 돌리다가 멈추면 술래가 종지를 가진 사람을 찾아내는 놀이이다. 들켰다 싶으면 놀이꾼이 반대쪽으로 종지를 던져 빼앗기지 않으려고 한다. 빼앗기면 그 사람이 술래가 된다. 수건 돌리기와 같은 이치이다.

다리밟기란 음력 정월 대보름을 전후로 하여 다리를 밟던 민속놀이를 말한다. 놀이는 고려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대보름날 다리를 밟으면 1년 동안 액(厄)을 면한다고 하여 남녀 귀천 없이 밤을 세워 가며 다리를 밟고 다녔다. 벌말 다리밟기는 구리시 토평동 벌말돌섬 마을을 중심으로 행해지던, 풍수 재해로부터 피하기 위한 '청명제(淸明祭)' 형식의 민속놀이였는데, 1916년까지 돌섬과 벌말을 잇는 목교(木橋)에서 성행되었다. 정월 14일에 서울에서 소리꾼을 불러다 밤이 새도록 마을 구석구석을 돌았는데, 부유한 가정에서 특별히 초청하여 주연을 베풀고 집안의 평온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마당놀이 형식의 벌말 다리밟기로 발전하였다. 제1마당은 길놀음과 농기 배례, 제2마당은 지신밟기와 우물 풀이, 제3마당은 다리밟기와 다리 풀이, 제4마당은 경기 민요 선소리, 제5마당은 석전 및 화합의 한마당으로 구성된다.

[구리시 민속의 변화 양상]

구리시의 민속은 과거 농경 사회를 거쳐 오늘날 도시화가 되면서 많은 변모를 하였다. 농경 생활을 하던 촌락 중심의 사회에서는 마을마다 풍물패가 있어 정월 등에는 지신밟기를 하고, 농사철에는 두레 조직이 있어서 일터에서 한바탕 놀기도 하면서 노동의 고단함을 달랬다. 갈매동 도당굿과 같이 마을에서는 도당굿이 행해졌으며, 마을신에 대한 숭배도 지극하였다. 또 아동 놀이와 성인 놀이 등 각종 민속놀이도 풍부하였다. 촌락 생활은 비록 가난했으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이웃이 있었으며, 혼례·회갑·상례에는 다 같이 모여 서로 도와주며 마을의 행사로 환원하였다. 그러나 도시화와 함께 구리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외곽의 변두리 지역에도 택지가 조성되면서 구리시의 자연 촌락은 더욱 설 자리가 좁아졌고, 촌락에서 행해지던 많은 민속이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현대의 도시 문화와 대중 문화가 대신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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