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들의 정원 곁에 살다, 동창마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80021
영어공식명칭 Live beside Garden of Kings, Dongchang Maeul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서종원

[정의]

경기도 구리시 동창마을 주민들의 삶과 동구릉과 관련된 독특한 문화 이야기.

[개설]

경기도 구리시 동창마을 주민들의 삶을 세 가지 주제들, 즉 능 곁을 떠나지 못한 동창마을의 선조들, 능과 관련된 동창마을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 동구릉으로 인한 동창마을의 독특한 문화들 등을 가지고 독특한 문화 이야기로 풀어 보고자 한다.

[능 곁을 떠나지 못한 동창마을의 선조들]

경기도 구리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 유산은 누가 뭐라고 해도 동구릉이다. 동구릉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을 비롯하여 여러 왕과 왕비의 능이 아홉 개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동구릉의 옛 명칭은 『영조실록(英祖實錄)』 33년 무신년 조에 “호랑이가 동오릉(東五陵)에 들어갔으므로 군문(軍門)에 명하여 잡도록 하였다.”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여지도서』에는 ‘육릉동(六陵洞)’이라 표기되어 있으며, 1842년경 간행된 『경기지』의 지도에는 ‘칠릉(七陵)’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동구릉은 능이 새로 생길 때마다 시기별로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동구릉의 명칭이 정착된 시기는 1855년으로 추존왕 익종의 묘를 용마봉에서 옮겨와 9개의 능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동구릉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깊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의 명을 받아 한양과 가까운 곳에서 길지(吉地)를 물색하다가 검교 참찬 의정부사(檢校 參贊 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으로 하륜(河崙)이 양주 검엄(楊州 儉嚴)에 나아가 보고 능지로 택정하였다고 한다. 항간에는 동구릉 상지 전설(相地 傳說)은 태조가 생전에 무학(無學) 대사를 시켜 자기와 후손이 함께 묻힐 적지를 택정해서 얻은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동창(東倉) 마을은 바로 동구릉 주변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는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속해 있다. 동개·웃말·아랫말·샛말 등을 합쳐 동창이라 부르는데, 이 명칭은 조선 시대 한양에서 동쪽 방향으로 약 30리 지점에 있던 동창(東倉)이라는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동쪽의 창고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 동창은 능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녹을 주기 위한 쌀을 보관하던 창고이다. 마을 주민 대다수가 능을 관리하면서 녹을 받으며 생활하다보니 주변 마을에서는 동창마을을 일러 ‘작은 서울’이라 불렀다.

동창마을에는 고려 명종 때 이씨, 최씨, 김씨 등 세 성의 불교 신자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는 설이 전해온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어 단정할 순 없다. 다만 마을의 역사적인 부분에서 보면 앞서 살펴본 동구릉을 빼놓고 이야기하긴 곤란하다. 워낙 큰 규모의 왕의 무덤이기에 마을에 거주하거나 혹은 머물렀던 사람들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동구릉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구릉을 책임지는 참봉을 비롯해 능을 지키는 군인들, 그리고 떼와 잔디를 비롯해 주변의 자연 환경을 관리하는 잡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동창마을을 왕래하였다. 동구릉에는 개별 능을 책임지는 아홉 명의 능참봉도 있었다. 그들의 권세는 조선 시대만 하더라도 대단했다. 능참봉의 허락 없이 능에 들어갈 수도 없었으며, 주변에서 아무도 건드리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유독 군인들의 수가 많았는데, 능을 지키거나 일반인들이 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게 그들의 주요 임무였다.

조사 과정에서 만난 구리 문화원 향토사 연구소 박명섭 소장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능을 지키는 군사가 처음에는 100명이었는데 태조 대왕 때는 그 다음에 정종 대왕이 생기고, 아 문종 대왕이 생기고서는 5대 문종 대왕이 생기고선 70명으로 줄어 그 능을 지키는 거여. 능을 왜 지키냐면 화소 지역이 있는데 그 안에는 아무도 못 들어와야 되거든. 농사도 못 짓고 그런 거였는데, 하지만 자리가 좋다고 생각하고 아버지 어머니 시신을 몰래 묻은 경우도 있다."라고 하였다.

기록된 자료가 없어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주민의 말을 종합해 보면, 현재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동구릉이 생기면서 관리하러 온 사람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그들의 조상들 대부분은 잔디 등을 보수하러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수복방이라는 곳에 머무르며 생활하다 동창마을에 완전히 정착을 하였다. 동구릉 주변에 있는 여러 마을 중에서 유독 동창마을과 사노리 마을에 그러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성근의 제보를 보면, "그렇지, 토백이. 그 지금 동창에 동창도 그렇고, 사노리도 그렇고, 동창 사노리 이쪽 사람들이 이제 능 하나 저기를 하려면 태조 대왕 같은 경우도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그러면 이 사람들이 여기 와서 5개월 동안에 머물러 있어야 되니까 건달끼가 있고 그런 사람은 남의 집 처녀라도 데리고 장가라도 들어서 머슴 비슷하게 살다가 저기를 하고. 이런 저기가 있어서 그래서 사노리에는 네 분의 노인네가 있었다 그랬는데 네 분의 노인네가 지금 내가 생각하면 저 김씨네가 있고 김씨, 주씨 그 다음에 어쨌든, 네 노인네가 있어서 하튼 그 사람들이 이 능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자리를 잡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거기에 있으면서 여기 능에 가서 또 일을 하니까."라고 하였다. 이성근의 조부 역시 위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동창 마을에 정착을 하였다고 한다.

[능과 관련된 동창마을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

동창마을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이 다른 지역과 크게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능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연유로 몇 가지 특이한 사례가 보여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동창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대표적인 성씨는 황씨와 강씨, 그리고 김씨이다. 이들이 언제부터 동창마을에 살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들의 조상들 역시 능을 관리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터를 잡은 사람들이다. 김현호는 손자를 포함해 6대째 동창마을에 살고 있다. 김현호의 중조부는 태조 왕릉 옆의 선조 대왕 목릉 책임자로 동창마을과 연을 맺었다. 목릉 책임자였던 중조부가 하던 일 중에 하나는 덕소 우시장이 열리면 거기에서 ‘말뚝세’를 받아 동구릉에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말뚝세는 요즘으로 말하면 주차 요금이나 다름없는데, 장날이면 김현호의 중조부는 쇠말뚝하고 세금을 걷기 위한 요강 모양의 함을 가지고 우시장에 갔다고 한다.

동구릉 주위에 있는 마을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동창마을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기 어려웠다. 물론 농사를 지을 여유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능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도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지역 주민들은 동구릉 주변에 살던 사람들을 ‘능에서 많이 빌어먹고 사는 사람들’로 인식하고 있다. 동창 마을 주민들 대부분은 이 말처럼 능에서 잔디를 보수하거나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하며 살았다.

이수자[전 중앙 대학교 교수]의 자료 조사에 의하면, "그 전에 뭐 능에서 나오는 게 여간 많아요? 그 인제 제초할 때든지 또 뭐, 길 닦는 데든지 그냥 당최 뭐 하는, 지역이 넓으니까 길 딱으믄 날마다 길 닦는 데 돈 주지, 또 체초허는 데 돈 주지, 그 그냥 거기서 저저로 벌어 먹고 살잖아요. 또 그것두 한 몫두 아니에요. 나라에서 키는 게 어수룩해서, 호랑이가 담배 먹을 때지, 한 사람만 돈을 타는 게 아냐, 돈 타는 데 가면 '접죠 납죠[저두 있고 또 딴 사람두 있구]' 이래구 돈을 타다 먹구 산다구."라고 하였다.

무더운 여름이 되면 동창마을을 비롯해 동구릉 주위의 마을 주민들은 동구릉 안에 들어가 각자 맡은 능 주변에서 벌초와 청소를 하였다. 동구릉 안에는 낙엽을 비롯해 땔감으로 쓸 수 있는 것들이 많아 몰래 들어가 이들을 가지고 나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날만은 공식적으로 가져갈 수가 있었다. 능을 관리하던 사람이 가져가도록 허락을 한 것이다. 허락을 받고 가져온 나무는 주민들끼리 서로 나눠 갖는다. 과거 동창마을 주민들에게 땔감은 무척 중요하였다. 특히 연탄 등의 석탄 연료가 등장하기 전까지 땔감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보니 채취한 땔감은 등짐을 지고 동대문에서 남대문까지 돌아다니며 팔았다. 간혹 200리나 떨어진 강원도 춘천까지 걸어가 땔감을 팔기도 했는데, 집에 올 때는 번 돈으로 잡곡을 사오기도 하였다.

평소 능 안에 있는 나무를 함부로 벨 수가 없다 보니 동구릉에는 무성한 나무들이 정말 많았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엔 동구릉에서 나무를 도벌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동구릉에는 특히 소나무가 많았는데, 간혹 동구릉 주위의 다섯 마을[간촌 마을, 동창 마을, 사노동 마을, 갈매동 마을, 신내동 마을] 주민들은 솔가지와 솔뿌리를 몰래 가져가 내다 팔았다. 구리 문화원 향토사 연구소 박명섭 소장은 이러한 모습은 6·25 전쟁 때 특히 두드러졌다고 한다. 전쟁으로 인해 제대로 능을 관리할 수가 없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박명섭 소장의 제보에 의하면, "[동구릉 안의 나무들이 땔감으로 사용한 적도 많다고 그러더라고 몰래?] 그거는 6·25 전쟁 때 참 많이 베어 갔지. [왜요?] 아 6·25 전쟁 때 누가 지켜 지키질 않으니까 여기 전부 다 나무해서 때고 살았잖아 그리고 이제 동구릉에도 능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싹 빌 수는 없잖아, 풀을. 그러니까 인창리 사람들은 이 능을 금초를 하고 이렇게 이 안에 있는 나무는 소나무를 제외한 나무를 비어서 거기 일한 사람들이 노나 갖는 거야."라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땔나무를 하고, 그 직위가 높거나 특별한 직책이 없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평소엔 농사를 짓거나 밭을 일구며 생활하다 능에서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가서 일을 하였다. 국가에서 운영되다 보니 몇 시간만 가서 일을 하여도 하루 품값이 나왔다. 농사일은 언제 돈이 나올지 모르지만 능에서 하는 일은 바로 품삯을 주니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런 일을 하려고 했다. 마을 주민들은 정초가 되면 산신제와 부군제를 지낸다. 산신당은 구릉산 정산에 있는 바위이며, 부군당은 양기와로 된 집이었는데 한국 전쟁 때 소실되어 다시 지은 것이다. 마을에서 깨끗한 사람을 뽑아 제주를 시켰으며, 제주로 뽑힌 사람은 금기를 지켜야 한다. 제의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각 가정마다 일정한 액수를 걷는다. 제물로는 수퇘지와 시루떡, 북어, 대구포와 삼색 실과가 오르며, 술은 제관이 직접 빚은 걸 사용한다. 그리고 여름이면 날을 잡아 동네 잔치를 하였다. 농사일도 잠시 손을 놓기 때문에 주민들은 집집마다 쌀이며 돈을 추렴해 음식과 술을 장만해 신나게 하루를 보냈다.

[동구릉으로 인한 동창마을의 독특한 문화들]

여러 왕들이 영면(永眠)하고 있는 동구릉 주위에 위치한 동창마을은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몇 가지 문화가 전해온다. 명확하게 어떤 연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마을 주민들을 비롯해 다른 지역 주민들은 그러한 연유를 동구릉에서 찾고 있다.

첫 번째는 장례식을 치루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달구지[땅 다지기] 행위가 다른 지역과 조금 다르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시신을 땅에 묻고 흙은 덮은 다음 시신이 놓인 곳을 중심으로 달구지를 하는데, 동창마을에서는 시신을 밟지 않고 주변만 빙빙 돌며 달구지를 한다. 이런 양상은 동구릉 주위에 있는 사노리 마을에서도 나타난다. 동창마을과 사노리 마을에서 이런 식으로 달구지를 하는 이유는 동구릉에서 하는 모습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라 한다. 왕의 시신을 함부로 밟을 수 없었기에 동구릉에서 행해지는 장례식은 시신이 묻혀 있는 주변에서만 달구지를 했다. 동창마을 주민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그런 식으로 달구지를 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도투마리경[도투마리경 읽기]’이라는 풍속이다. 우리 조상들은 병이 생기면 병을 옮기는 주체를 귀신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병을 치료하는 의원을 찾기보다는 귀신을 쫓을 수 있는 경(經)을 읽으면 귀신이 달아난다고 믿었다. 이때 읽는 경이 바로 ‘도투마리경’이다. 도투마리를 동창마을에서는 ‘동토’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동티를 말한다. 결국 동창마을에서 행해지는 도투마리경은 이유를 알 수 없이 갑작스레 생기는 동토를 치료하기 위해 행하는 의례인 셈이다. 마을 주민들은 외부에서 이사를 오거나, 혹은 초상집을 다녀왔을 때 동토가 생길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일을 한 사람에게 갑작스레 오환이 생기면, 고추를 아궁이에 넣고 태워 동토에 걸렸는지를 확인한다. 냄새가 나지 않으면 동토에 걸린 것으로 확정하여 도투마리경 의례를 행한다. 의례는 보통 도투마리경을 외우고 있는 세 사람이 주도하는데, 메밀떡 등의 제물을 차리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행해진다.

동토를 치료하기 위해 행해지는 도투마리경이 유독 동창 마을에서만 전승되는 이유를 어느 누구도 정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동구릉을 오가던 사람들 대부분이 궁궐에 있던 사람인 연유로 이들에 의해 전승되었을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는 없다. 비록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나 이러한 문화가 동창마을에서만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주목해 보아야 한다. 동창마을 주민들이 느끼는 자긍심 내지 자부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마을의 산제에서 모시고 있는 산 할아버지를 태조 이성계로 생각하거나 어린 아이들에게 함부로 동구릉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동구릉에 흙이 묻을 수 있느니 동구릉에 갈 때는 절대로 새로 만든 짚신을 신으면 안 된다는 생각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모습은 주민들의 기질로 표출된 듯하다. 예전부터 동창 마을 주민들은 깡이 센 걸로 유명했는데 그런 탓에 다른 지역 주민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지금이야 그런 일이 없지만 다른 마을 아이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너 어디 사냐?” 묻는 경우가 있는데, 동구릉 근처 동창마을에 산다고 하면 아무 말 없이 도망을 갔다고 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동구릉의 위상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위상이 약해지면서 예전의 활기찼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