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2038
한자 張德秀
영어공식명칭 Jang Deoksu
이칭/별칭 설산(雪山)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장덕수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1년 - 장덕수, 사립 연의 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06년 - 장덕수, 사립 연의 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2년 - 장덕수,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16년 - 장덕수,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23년 - 장덕수, 미국 오레곤 주립 대학 유학
수학 시기/일시 1936년 - 장덕수, 미국 컬럼비아 대학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장덕수, 김철수(金喆壽) 등과 신아 동맹당(新亞同盟黨)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장덕수,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장덕수, 『동아 일보 초대 주필 및 부사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 장덕수, 북미 한국 유학생 총회 부회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0년 - 장덕수,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참사(參事) 발령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장덕수, 일제 침략 전쟁 협력 단체인 ‘조선 임전 보국단’ 발기인과 이사로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장덕수, 국민 의용대 조선 총사령부 지도 위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장덕수, 한국 민주당 창당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47년 12월 2일연표보기 - 장덕수, 암살로 사망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38년 - 장덕수, 흥업 구락부 사건에 연류
출생지 재령군 - 황해도 재령군
거주|이주지 서울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상해 - 중국 상하이
학교|수학지 사립 연의 학교 - 황해도 재령군
학교|수학지 와세다대학 - 일본 도쿄
학교|수학지 오레곤(Oregon) 주립 대학 - 미국 오레곤주
학교|수학지 컬럼비아(Columbia) 대학 - 미국 컬럼비아주
묘소 망우리 공원묘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 570[망우동 산57]
성격 인물[언론인|정치인]
성별
대표 경력 신한 청년당|동아 일보 주필|보성 전문 학교 교수|조선 임전 보국단 이사|한국 민주당 외교부장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된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이자 정치인.

[가계]

장덕수(張德秀)[1894~1947]는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출신으로,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이다. 아버지는 장붕도(張鵬道)이고, 어머니는 김현묘(金賢妙)이다.

[활동 사항]

장덕수는 1900년 서당에서 1년간 한문 교육을 받았고,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사립 연의 학교(私立演義學校)에서 수학하였다. 빈농 출신으로 10세 때 아버지가 작고하고 총독부 하급 기관에서 급사로 근무하였다. 독학을 하여 1911년 조선 총독부 판임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1912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해 재일본 동경 조선 유학생 학우회(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에 가입하고, 이 단체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는 편집부 부장과 평의원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1916년 김철수(金喆壽) 등과 함께 일제 타도와 새 아시아의 건설을 목표로 신아 동맹당(新亞同盟黨)을 조직하였고, 1918년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였다.

1919년 상하이에서 국내로 잠입하였다가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 유배형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일제는 임시 정부의 지도자 여운형을 회유하려고 도쿄로 초청하였는데 장덕수가 통역으로 지명되면서 하의도에서 풀려나 여운형과 함께 도쿄에 가게 되었다. 이때 여운형은 일제의 의도를 뒤집고 오히려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선전하고 돌아왔는데, 장덕수의 통역이 크게 기여하였다. 장덕수는 와세다 대학 때 전일본 대학생 웅변대회에서 1위를 한 웅변가였다.

장덕수는 1920년 『동아 일보』 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동아 일보의 창간사 주지를 선언하노라」라는 글은 매우 유명한 명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초반 조선 교육회 평의원, 조선 청년회 연합회 집행 위원, 조선 노동 공제회 의사부원을 비롯한 사회단체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민립 대학 설립 기성 준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동아 일보사가 발기한 재외 동포 위문 순회 강연단의 일원으로 여러 차례 강연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의 사회 혁명당(社會革命黨)과 상해파 고려 공산당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부터 미국에 유학하면서 북미 한국 유학생 총회(北美韓國留學生總會)에 가입하여 부회장 등을 맡았는데, 특히 이승만 지지 단체인 동지회(同志會)에 가입해 1927년부터 허정(許政) 등과 함께 『삼일 신보』의 창간 및 발간을 위해 노력하는 등 이승만을 지지·지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1936년 귀국한 후 1937년 보성 전문학교 강사를 거쳐 교수로 활동하였으며, 『동아 일보』의 취체역을 겸직하였다.

1938년 흥업 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에 연루된 후 일제가 사상 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친일 단체인 시국 대응 전선 사상 보국 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의 간부를 지내면서 기관지 『사상 보국(思想報國)』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1939년 일제 전시 체제에서 관변 통제 단체인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과 1940년 이 단체를 확대 개편한 국민 총력 조선 연맹의 참사(參事) 등을 맡았고, 대화숙(大和塾)에 참여하였다. 1941년 일제 침략 전쟁의 협력 단체인 조선 임전 보국단의 발기인과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해방 직전에 결성된 국민 의용대 조선 총사령부 지도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장덕수는 친일 단체 활동과 더불어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지원하는 내용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였고, 여러 차례 강연하였다. 이는 당시의 시대 상황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했다 하더라도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 해방 후 1946년 10월에 실시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선거 때 서울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으나, 선거 무효로 다시 실시된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송진우·김성수 등과 함께 한국 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외교부장과 정치국장 등을 지내며 당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1947년 12월 2일 집을 찾아온 두 괴한에게 피살되었다.

[묘소]

장덕수의 묘는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역에 있다. 묘지에 연보비를 세웠는데, 『동아 일보』 창간 때 쓴 '조선 민중의 표현 기관으로 자부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주지(主旨)를 선언하노라」에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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