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2025
한자 金奎植
영어공식명칭 Kim Kyusik
이칭/별칭 노은(蘆隱),서도(瑞道),호장군(虎將軍),금성(金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 1월 15일연표보기 - 김규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김규식 의병 활동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12년 3월 - 김규식 만주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8월 - 김규식, 서일·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 군정서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0월 - 김규식,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 대파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2월 - 김규식, 대한 독립 군단 총사령에 취임하고 부대와 함께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
활동 시기/일시 1921년 6월 - 김규식, 자유시 사변으로 무장 해제 당한 뒤 연길현으로 돌아옴
활동 시기/일시 1923년 5월 - 김규식, 고려 혁명군 조직하고 총사령관으로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김규식, 신민부에 가담하여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6년 4월 5일 - 김규식, 고려 혁명당 중앙 위원으로 선정
몰년 시기/일시 1931년 4월 13일(양)연표보기 - 김규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3년 - 김규식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4월 13일 - 노은 김규식 선생 추모제 거행[구리시]
출생지 사노동 -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사노동 281[현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281-14]
거주|이주지 남만주
활동지 남만주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북로군정서 제1대 대장|대한독립군단 총사령

[정의]

경기도 구리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규식(金奎植)[1882~1931]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사노동[현 구리시 사노동] 출생이다. 아버지 김영선(金永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규식은 한말 육군 참위(參尉)로 복무하다 1907년에 정미 칠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강원도 철원에서 흩어진 군인을 규합하여 의병 활동을 펼쳤으며, 1912년 3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1919년 8월에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처음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군사 간부 양성 학교이자 김좌진이 소장인 사관 연성소(士官鍊成所)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사관 연성소는 1920년 3월 만주 왕청현(旺淸縣) 십리평(十里坪)에 세운 학교이다. 생도들은 주로 대종교의 청년 신도와 왕청현 덕원리(德源里)에 있던 명동 학교(明東學校) 학생들이었다.

1920년 10월에 북로 군정서 제2연대 제1대 대장으로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이어 1920년 12월에 밀산(密山)에서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대한 정의 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야단(野團) 등 여러 단체의 군대를 통합하여 대한 독립 군단(大韓獨立軍團)을 편성하고 총재에 서일, 부총재에 홍범도(洪範圖)·김좌진·조성환(曺成煥)이 각각 취임하였다. 김규식은 총사령에 취임하여 참모 총장 이장녕(李章寧), 여단장 지청천(池靑天) 이하 3,500여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갔다. 그러나 1921년 6월에 자유시 사변(自由市事變)으로 무장 해제를 당한 뒤 김규식은 다시 소만 국경을 넘어 옛 근거지인 연길현(延吉縣)으로 돌아와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노병회의 지원을 받아 망명군을 재편성하였다. 한편, 1923년 5월 고평(高平) 이범석 등과 고려 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으로서 영농과 군사 훈련을 강화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고려 혁명군은 병농 일치(兵農一致)의 제도를 실시하여 농사를 짓고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소련령으로부터 비밀리에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하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

1925년 김좌진·김혁(金赫) 등이 북만주에서 민족주의 대표를 망라하여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 이념과 사상으로 무장한 독립 투쟁을 위하여 각계의 혁신적인 대표들이 모여 양기탁(梁起鐸)을 위원장으로 하는 고려 혁명당(高麗革命黨)이 그해 4월 5일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직되었다. 김규식 중앙 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조직 당시의 당원 수는 약 1,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후 장기적인 항일 투쟁은 2세 국민들의 교육밖에 없다고 판단한 김규식은 자신이 거주하던 연수현(延壽縣) 태평촌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4월 주하현(珠河縣) 하동 농장(河東農場) 이붕해의 집에서 신숙·이청천 등을 만나 장래의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하였는데, 그날 밤에 하동 농장에서 직권을 남용하며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사던 백운봉과 최호 등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규식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1963년에 국가 보훈처로부터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구리시에서는 해마다 4월 13일에 김규식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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