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오세창 묘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067
한자 忘憂獨立有功者墓域-吳世昌墓所
영어공식명칭 Ohsechang Myo|Tomb of Ohsechang
이칭/별칭 위창 오세창 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명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953년 4월 18일연표보기 - 오세창 이장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864년 7월 15일 - 오세창 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953년 4월 16일 - 오세창 몰
문화재 지정 일시 2017년 10월 23일연표보기 -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오세창 묘소 국가등록문화재 제691-1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오세창 묘소 국가등록문화재 재지정
현 소재지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오세창 묘소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지도보기
성격
양식 사성과 병풍석이 있는 방형분
관련 인물 오세창|오경석
소유자 개인 소유
관리자 망우 공원묘지 관리 사무소
문화재 지정 번호 국가등록문화재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있는 독립운동가 오세창의 묘.

[개설]

오세창(吳世昌)[1864~1953]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호는 위창(葦滄)이다. 서울 시동(詩洞)[청계천 2가]에서 역관 오경석(吳慶錫)[1831~1879]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천도교인이다. 아버지 오경석과 함께 민족의 개화와 독립에 앞장섰다. 약관 23세에 벼슬길에 나아가, 우리나라 언론 1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한성주보(漢城周報)』 기자를 지냈고, 『만세보(萬歲報)』와 『대한민보(大韓民報)』 사장을 지내면서 개화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에 투신했다. 또한 서예가로써 전서(篆書)·전각(篆刻) 및 서화 감식에 뛰어났다. 2017년 10월 23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91-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망우 공원 관리 사무소에서 왼쪽 순환로를 따라 구리시 방향으로 오르면 동락천 약수터를 지나서 방정환 연보비가 보인다. 좀 더 올라가면 왼편에 팔각정이 나타난다. 입구 양쪽에 문일평오세창의 연보비가 있다. 길 건너 맞은편에 문일평 묘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오세창 묘소 입구를 안내하는 표지석과 계단이 보이고 올라가면 오세창의 묘가 있다[묘지 번호 203733].

[변천]

오세창은 1953년 4월 16일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유언대로 화장하여 유골은 범어사 선방에 모셨다가 1954년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했다

[형태]

사성(莎城)[무덤 위에 반달 모양으로 둘러막아 쌓은 둑]에 둘러 싸인 봉분에는 병풍석(屛風石)[능, 묘의 봉분 둘레에 병풍같이 둘러막아 쌓은 돌. 둘레돌]이 있고 봉분 앞에 상석과 향로석(香爐石)[무덤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돌]이 있다. 묘 입구 양편에 망주석(望柱石)[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이 마주 보고 세워져 있으며 봉분 오른쪽에는 가첨석(加檐石)[비신 위에 얹은 지붕 모양의 돌]을 올린 비석이 있다. 1956년 10월에 세운 묘비는 앞면 전각 글씨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孫在馨)이 전자(篆字)로 썼고, 후면에는 전홍진(全弘鎭)이 짓고 김응현(金膺顯)이 글씨를 썼다.

[금석문]

묘비 전면에는 '위창 오세창 묘(葦滄吳世昌墓)'라고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이 묘에 잠드신 위창 선생 오세창 어른은 1864년 7월 서울에 나시어 1953년 4월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구십. 민족의 개화를 위하여 몸소 그 선구을 잡으셨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독립 선언 33인 중에 열하시였을 뿐 아니라 문화의 발전에 크게 힘주시어 서예와 금석 고증의 거벽을 이루시니 평생에 남기신 위공은 길이 빛나 비길 바 없다. 어른 가신지 3년 후생과 유족이 뜻을 모아 선생이 끼치신 빛을 오래 계승하려 이에 1956년 1월 이 묘비를 세우다. 1956년 1월 일(이 墓에 잠드신 葦滄先生 吳世昌 어른은 一八六四年 七月 서울에 나시어 一九五三年 四月 世上을 떠나시니 享年 九十. 民族의 開化를 爲하여 몸소 그 先驅을 잡으셨고 祖國의光復을 爲하여 獨立宣言 三十三人中에 列하시였을 뿐 아니라 文化의 發展에 크게 힘주시어 書藝와 金石考證의 巨擘을 이루시니 平生에 남기신 偉功은 길이 빛나 비길바 없다. 어른 가신지 三年 後生과 遺族이 뜻을 모아 先生이 끼치신 빛을 오래 繼承하려 이에 一九五六年 十月 이 墓碑를 세우다. 一九五六年十月 日)'라고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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