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21021
한자 近代
영어공식명칭 Moder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미엽

[정의]

개항기인 1864년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의 경기도 구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19세기 조선은 내적으로 세도 정치와 신분제 동요 등의 변화를 겪고 있었고, 외적으로는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서양 문물의 수용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로 개항을 한 조선은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을미개혁 등을 실시하였지만, 결국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다. 일제는 1945년까지 한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을 바탕으로 조선을 통치하였다. 이에 대해 한민족은 3·1 독립 만세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만주 무장 항쟁 등으로 대항하였다. 이 시기 구리 지역은 1894년 조선 정부의 면세지 철폐 조치에 따라 역둔토(驛屯土) 정리 사업이 실시되었고, 1914년에는 일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이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3·1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역둔토 정리 사업의 실시]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로 조선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여러 개혁을 실시하였다. 조선 정부는 토지 소유권의 확립과 재정 확충을 위해 토지 조세를 개혁하는데, 그중 하나가 갑오 승총(甲午陞總)이라 불리는 면세지 철폐 조치이다. 1894년 군국기무처에서는 ‘궁토(宮土)·역토(驛土)·둔토(屯土)의 출세(出稅)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궁장토(宮庄土) 등의 수입은 계속 각 궁이 관리하지만 지세는 조세 금납화에 의거하여 징수하고, 역둔토의 경우 은결(隱結)[조선 시대에, 탈세를 목적으로 전세(田稅)의 부과 대상에서 불법으로 누락시킨 토지]과 결세[고려ㆍ조선 시대에, 농토의 면적 단위인 결(結)을 기준으로 매기던 토지세]가 헐한 토지 등을 조사하여 현금으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어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1898년부터 1904년까지 광무 양전 사업(光武量田事業)을 실시하였다.

이 시기 경기도 양주에 소속된 구지면(龜旨面)에는 총 9릉 17위가 모셔진 동구릉(東九陵)이 자리하고 있었고, 능침의 보수와 유지를 위해 면세전인 묘위전(墓位田)이 많이 설치되면서 각종 역(役)의 부담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다. 이러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조선 정부에서는 경기도 고양 지역과 함께 양주의 비면세지에 대한 전세(田稅)를 감해 주기도 하였지만 양주 주민들의 부역 부담은 상대적으로 과중하였다.

[의병 운동]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병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경기도 구지면 사노리[현 사노동] 출신의 김규식(金奎植)은 1908년 1월 13도 연합 의병 부대가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칠 때 허위(許蔿)·연기우(延基羽)와 함께 봉대에 섰으며, 권중설·김수민 부대 등과 함께 마전·장단 등 임진강 유역과 양주를 중심으로 경기도 가평·적성·포천·연천 등지에서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이후 1908년 일본군에 체포된 김규식은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 일대에서 지속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펼쳤다.

[일제 강점기]

1. 행정 구역의 변화

일제는 1910년 10월 「면(面)에 관한 규정」을 반포하여 기존의 군현제를 면 중심으로 개편하였다. 1914년 양주군의 구지면망우리면이 통합되면서 양주군의 진관면·별비면·미음면·노원면의 일부 지역도 편입되었는데, 이때 구지의 ‘구(九)’자와 망우리의 ‘리(里)’자를 따서 구리면(九里面)이 되었으며, 묵동리·중하리·상봉리·신내리·망우리·인창리·사노리·교문리·수택리·토평리·아천리·갈매리 등 12개 리를 두었다.

2. 구리 지역의 독립운동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구리 지역은 3월 13일 양주군 구리면 평내리 구장(區長) 이승익(李昇翼)이 주도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고, 3월 28일에는 구리면 아천리이강덕(李康德)심점봉(沈點奉)이 이끄는 시위 행렬이 구리면 토평리교문리까지 진출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청년 단체와 사회단체의 조직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구리 지역을 포함한 양주 지역에서도 양주 천도교 청년회와 양주 청년회 등이 결성되어 계몽 활동을 펼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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