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21013
한자 三國時代
영어공식명칭 the Three Kingdom Period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고대/삼국시대
집필자 최상기

[정의]

경기도 구리 지역에서 고구려·백제·신라가 정립했던 시대의 역사와 문화.

[개설]

백제의 영역에 있던 구리 지역은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5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군사적 영향력 아래 들어갔다가, 551년 백제와 신라의 동맹으로 고구려를 몰아내면서 백제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2년 후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에 구리 지역은 황양현(荒壤縣)에 속하게 되었다.

[구리 지역과 백제]

구리 지역은 삼한(三韓) 시대 마한(馬韓)의 영역 안에 있었지만, 한강 하류 유역의 백제가 성장하면서 점차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특히 구리 지역은 당시 한강 남쪽에 위치한 백제의 도성 위례성(慰禮城)의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백제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 인해 아차산에서 확인되는 장성과 보루들이 백제에 의해 최초로 축조되었다는 주장이 한동안 제기되었다. 그러나 장성은 조선 시대 사복시(司僕寺)가 관할하던 살곶이 목장[전관 목장(箭串牧場)]의 담장 흔적이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며, 서울 대학교 박물관에서 수년에 걸쳐 발굴 조사를 한 결과 보루들을 쌓은 주체가 고구려임이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아차산의 유적들만으로 구리와 백제의 명확한 관계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구리 지역과 고구려]

구리 지역은 삼국시대 백제의 영향력 안에 있었지만,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남진 정책으로 인해 점차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특히 475년 장수왕(長壽王)의 명령 아래 고구려군이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키고 도주하던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을 생포해 아단성(阿旦城)[지금의 아차산성] 아래에서 처형한 사건이 보여 주듯이, 5세기 후반 이후 구리 지역을 포함한 한강 하류 유역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갈등이 이어졌고 결국 고구려의 군사적 영향력이 백제를 압도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지역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두고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지역에 골의노현(骨衣奴縣)을 두었다. 이들 지역에 인접한 구리 지역도 고구려의 행정 단위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재 아차산 일대에서는 고구려군이 축조했다고 밝혀진 보루들과 관련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것들은 고구려가 남진하던 시기에는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고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북진하던 시기에는 방어 기지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구리 지역과 신라]

구리 지역은 한동안 고구려가 차지했었지만, 551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각각 한강 하류와 상류에서 고구려를 축출하면서 다시 백제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2년 후 신라가 백제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한강 하류 유역을 차지하면서 결국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신라는 새롭게 확보한 한강 하류 유역에 경기도 하남시 지역을 중심으로 신주(新州)를 설치했고, 구리 지역도 그 범위 안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구리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은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유지되었고,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구리 지역은 이곳에 새로 설치된 행정 단위인 황양현에 속하게 되었다. 특히 아차산성에서는 회청색 경질(硬質) 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신라 토기와 각종 철제 무기 및 농공구, 신라에 의해 제작된 여러 점의 기와들이 출토되어 아차산성을 포함한 구리 지역과 신라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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