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20005
영어공식명칭 Goguryeo! Meet on Achasa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최상기

[정의]

경기도 구리 지역에 있는 아차산고구려 유적과 유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본 4세기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진행된 고구려의 역사.

[개설]

고구려(高句麗)는 압록강 유역에서 기원·성장해 한반도 북부 지역과 만주 일대를 중심 영역으로 삼았던 국가인 만큼, 남한 지역에서 고구려와 관련된 실제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구려가 대외적으로 팽창하던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초반까지 고구려한강 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으로 확장을 거듭했다. 지금까지 아차산에 남아 있는 고구려군이 축조한 보루 유적들과 각종 유물들이 상징하듯이 아차산 일대를 중심으로 당시 고구려의 모습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현재 구리시와 서울특별시의 접경 지역에 있는 아차산한강 유역의 요충지 중 한곳이었으며, 백제(百濟) 개로왕(蓋鹵王)의 처형과 고구려 장군 온달(溫達)의 전사 등 한국 고대의 역사 전개 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건들이 발생했었다. 각 사건의 주인공 중 하나는 언제나 고구려였다. 아래에서는 뿌리 깊은 고구려와 백제의 갈등 관계부터 고구려아차산 일대 지역 확보 및 백제와 신라에 의한 고구려한강 유역 상실까지의 역사적 흐름을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중국·일본의 전근대 시기 사서들과 아차산 일대에서 확인된 관련 자료들을 통해 살펴보겠다.

[갈등의 시작]

현존하는 한국의 가장 오래된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아들로 등장하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구려와 백제의 지배 세력은 본래 종족적·사회적·문화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가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해 관계가 충돌하면서, 지역적으로 가까웠던 두 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 기원전 108년 위만 조선(衛滿朝鮮)의 멸망 이후 전한(前漢)은 한반도 북부 지역에 4개의 군(郡)[한사군(漢四郡)]을 두었다. 평양 일대에 설치된 낙랑군(樂浪郡)은 설치 직후 약화·소멸된 다른 3개 군[임둔군(臨屯郡)·진번군(眞番郡)·현도군(玄菟郡)]과 달리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지되며 중국 문화의 유입 거점으로 기능했다. 또한 204년에는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帶方郡)도 설치되었다.

3세기 중반 이후 중국 지역이 혼란에 휩싸이면서 다수의 한족(漢族) 유력 세력들이 전란을 피해 한반도 북서부 지역의 낙랑군과 대방군으로 이주했는데, 이주한 한족들이 보유한 각종 선진 지식과 문물 및 토착 지역 세력들의 경제력은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한강 유역의 백제 사이에서 치열한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313년 낙랑군이, 314년 대방군이 고구려 미천왕(美川王)에 의해 소멸되면서 두 군 지역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백제 또한 고구려의 지배를 피해 남쪽으로 이주한 낙랑군과 대방군의 인력 상당수를 흡수하게 되었다.

[백제의 우위와 고국원왕의 전사]

낙랑군과 대방군의 소멸로 영역을 직접 접하게 된 고구려와 백제의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다. 4세기 이후 한반도 북서부 지역을 장악한 고구려는 요동 지역으로의 확장이 전연(前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 후, 전연의 침공을 피해 평양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긴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지휘 아래 한반도 중부 지역을 목표로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한편 백제 역시 비슷한 시기에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북진을 꾀하면서 고구려와 여러 차례 충돌했다. 평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황주(黃州) 지역[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에서 출토된 4세기 중후반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백제 토기는 비록 황주 지역이 완전히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것은 아니지만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영향력도 황해도 일대에 일정하게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고국원왕은 전연을 멸망시킨 전진(前秦)과의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요동 지역의 정세가 안정되자 백제에 더욱 공세를 취했으나, 369년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감행한 고국원왕의 친정(親征)은 근초고왕의 태자 근구수(近仇首)의 반격에 패배로 돌아갔고 371년 고구려군의 공격도 실패했다. 결국 고국원왕은 371년 겨울 근초고왕이 직접 지휘하는 백제군 3만 명의 평양성 공격을 방어하던 중 전사하고 말았다. 고국원왕의 사망으로 고구려의 중심지는 평양 지역에서 다시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國內城)으로 돌아갔고, 고구려의 남진 정책도 잠시 중단되었다.

[광개토왕의 등장과 고구려의 역전]

고국원왕의 사망으로 남진 정책은 일단 위축되었지만, 그 직후 백제와 신라(新羅)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함으로써 고구려는 내부 체제를 정비할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고국원왕에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小獸林王)은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공식적으로 도입해 정신적 구심점을 마련했고, 유학에 입각한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설립해 관료층을 양성했으며, 국가의 기본 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율령을 제정·반포·시행함으로써 체계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며 국력을 축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소수림왕 시기에 거둔 성과들을 바탕으로 고국양왕(故國壤王)에 이어 즉위한 광개토왕(廣開土王)은 주변 지역 공략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즉위 직후부터 백제와의 교전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고, 왜(倭)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5만 명의 대군을 신라의 도성이 있는 경주 지역으로 파견해 왜군을 축출했으며, 나아가 왜와 연결된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金官伽倻)를 중심으로 하는 전기(前期) 가야 연맹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또한 요동 지역에 침입한 중국의 후연(後燕)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인근의 군소 종족 집단인 거란[契丹]·숙신(肅愼)·동부여(東扶餘) 등도 굴복시켰다.

한편 「광개토왕릉 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 따르면 396년 광개토왕과 고구려군은 한강 북쪽에 위치한 백제의 성들을 함락시킨 후 한강을 건너 백제의 도성인 한성(漢城)[지금의 몽촌토성]을 포위했는데, 이때 함락시킨 성 중에 지금의 아차산성에 해당하는 아단성(阿旦城)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고구려군이 아차산 일대를 거쳐 갔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고구려군의 포위를 견디지 못한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 광개토왕에게 포로와 재물을 바치며 영원한 복종을 맹세한 일은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가 고국원왕 시기에 비해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장수왕과 개로왕의 격돌]

장수왕(長壽王)광개토왕 시기의 흐름을 이어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으로 팽창을 더욱 가속화했고, 백제의 개로왕은 아신왕 이래 추락한 권위를 회복하고 고구려에 대한 열세를 뒤집을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5세기 동북 아시아 지역의 가장 강력한 세력은 중국 북조(北朝)의 북위(北魏)였지만, 장수왕은 남조(南朝)의 왕조들 및 북아시아 지역의 유목 종족인 유연(柔燕)과 연계해 북위를 압박함과 동시에 북위와의 외교도 병행하는 강온 양면 정책을 통해 북위와의 무력 충돌 없이 만주 및 한반도 지역에서 고구려의 독자적 지위를 확립했다.

장수왕은 중국 방면의 안정 상황을 배경으로, 도읍을 국내성에서 광개토왕 시기에 9개의 사찰을 건립하며 이미 터를 닦은 평양 지역으로 옮김으로써 남진에 집중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한편 개로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다수의 왕족 인물들을 정치에 참여시켰으며, 부친 비유왕(毗有王)이 신라와 맺은 우호 관계를 재확인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중국 남조의 왕조들과 교류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472년에 교섭 경험이 없었던 북위에 사신을 파견해 고구려에 대한 협공을 제안했다. 개로왕의 요청은 고구려에 비우호적이었음에도 전쟁은 원하지 않았던 북위의 거절로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장수왕이 파견한 간첩인 도림(道琳)의 계략에 넘어가 각종 토목 사업을 일으켰다고 서술했지만 각 사업들은 단순한 폭정(暴政)이 아니라 국가 체제의 정비를 위한 것이었고, 특히 사성(蛇城)[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지역] 동쪽부터 숭산(崇山)[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동구 고덕동 지역] 북쪽까지 한강 하류 남쪽 연안에 축조한 제방은 비상시에 군사 시설물로 활용되었다는 견해가 근래 제기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토목 사업의 무리한 추진은 백제의 국력을 고갈시켰고, 북위 조정이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와의 교섭 사실을 외교적 카드로 활용한 결과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개로왕의 시도가 고구려에 알려지게 되었다. 잠재적 적대국인 북위와 백제의 연결이 부담스러웠던 장수왕은 475년 직접 고구려군 3만 명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는데, 백제의 도성을 구성하는 두 성 중 북성(北城)[지금의 풍납토성]은 7일 만에 함락되었고 남성(南城)[지금의 몽촌토성]으로 피신한 개로왕은 함락 직전 도주했으나 결국 사로잡혀 아차성(阿且城)[지금의 아차산성] 아래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장수왕 시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마침내 아차산 일대를 포함한 한강 유역을 차지했고, 정치·경제·군사·교통의 요충지인 한강 유역을 발판으로 한층 더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반면 개로왕의 동생 문주(文周)[『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서술했지만, 다른 관련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동생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는 신라의 구원군 1만 명을 얻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고, 피해를 수습해 웅진(熊津)[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으로 천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백제는 한동안 지배 세력 내부의 갈등과 혼란을 겪게 되었다.

[아차산의 고구려 보루들]

백제를 남쪽의 금강 유역으로 밀어낸 후, 고구려한강 유역을 영역화하기 위해 한강 하류 북쪽 연안 지역에 평상시 거점으로 사용할 남평양(南平陽)을 건설하고 남쪽 연안 지역에 위치한 백제의 한성을 군사적 전진 기지로 재활용했다. 아울러 남진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백제 및 신라와의 충돌을 대비해 한강 하류 지역은 물론 한강 상류로부터의 접근도 감시·통제할 수 있는 아차산 일대에 조밀하게 보루(堡壘)들을 조영하고 군대를 배치했다. 현재까지 아차산 일대[아차산 외에 용마산·망우산·서울시 광진구 지역 포함]에서는 17개의 보루 유적들이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었고, 아차산에는 능선을 따라 7개[1보루~6보루 및 시루봉 보루 포함]의 보루 유적들이 존재한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된 보루들은 일원적 지휘 체계 아래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기능했을 것이다. 문자가 기록된 토기 파편과 투구·등자 등의 철기를 포함해 중요 유물이 다수 발견된 아차산 4보루 혹은 아차산 보루들 중 가장 규모가 큰 아차산 3보루에 지휘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각 보루의 평면은 원형 또는 타원형이며, 외부의 성벽과 내부의 각종 시설물들로 구성되었다. 성벽의 재료로는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나무와 화강암을 이용했는데, 초기에는 목책(木柵)[구덩이에 나무 기둥을 세운 후 목재를 쌓아 만든 벽]을 설치했다가 이후 석벽을 축조했다고 추정된다. 현재 아차산 4보루시루봉 보루에서 목책의 흔적이 확인되며 특히 시루봉 보루의 목책은 이중 구조였다. 석벽은 경사진 지면을 평평하게 다듬은 후 대형 석재로 기단부를 세우고 그 위에 일반 크기의 돌을 수직으로 쌓는 방식으로 지었고, 벽 안쪽에 흙과 잡석(雜石)들을 채워 방어력을 보강했다. 각 보루의 석벽에는 대부분 크기만 일정하게 맞춘 돌을 그대로 이용했지만, 아차산 4보루의 경우 적군의 주요 침입 경로로 예상되는 남쪽과 동쪽의 성벽은 정밀하게 가공한 석재로 견고하게 쌓았다. 또한 아차산고구려 보루들은 모두 성벽 방어 시설인 치(雉)를 갖추었는데, 대부분 성벽에서 돌출한 형태이지만 아차산 4보루의 남쪽 치는 성벽에 연결된 부분과 그 앞의 약간 떨어진 위치에 돌을 쌓아 만든 시설물로 구성된 이중 구조였고 시루봉 보루의 남동쪽·남서쪽 치는 성벽에서 일정 간격을 두고 독립적으로 축조한 특이한 모습이다.

한편 아차산 3보루를 제외한 다른 보루들에서는 출입 시설을 확인할 수 없는데, 사다리와 같은 별도 수단을 이용해 안팎을 드나들었다고 추정된다. 각 보루의 내부에서는 평상시 생활과 비상시 농성(籠城)에 필수적인 저수 시설과 배수로, 식량을 가공하기 위한 방아 시설, 각종 병기와 생활 용품을 제작·수리할 수 있는 대장간 시설, 아차산 일대 지역과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관청 시설 등 다양한 시설물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초기 철기 시대에 만주 동부 및 연해주 지역에서 등장해 고구려로 전해진 난방 시설인 쪽구들[아궁이에서 불을 피웠을 때 열기와 연기가 지나가는 통로가 1개인 구들]의 흔적이 아차산 보루들의 각 건물에 1개 이상 남아 있으므로, 다른 내부 시설 및 쪽구들을 통해 당시 아차산 일대에서 활동하던 고구려군의 일상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한강 유역 상실]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는 물론 신라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고구려광개토왕 시기에 이미 신라의 요청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까지 출병했었고, 이후 고구려군 일부가 신라 영역 내에 주둔하며 신라 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신라의 입장에서 실성(實聖)과 눌지(訥祗)의 왕위 분쟁에 개입해 눌지의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할 만큼 지나치게 커진 고구려의 압력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고구려 견제라는 같은 목적을 가진 백제와 신라 사이에 동맹이 성립했고, 비록 475년 개로왕의 사망과 한성의 함락은 막을 수 없었지만 백제와 신라는 6세기 초반 남한강 유역과 소백 산맥 일대를 경계로 고구려의 공세를 둔화시키는 일에 성공했다. 544년 말 안원왕(安原王)의 사망 이후 고구려 지배 세력 사이에서 발생한 대규모 왕위 계승 분쟁은 백제와 신라에게 북진의 좋은 기회가 되었고, 결국 551년 고구려한강 하류 유역을 백제에게, 한강[북한강] 상류 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겼다.

아차산 보루 유적들에서 불에 탄 상태로 출토된 병기 및 생활 용품들은 당시 보루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이 백제군과 신라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을 짐작케 한다. 설상가상으로 고구려는 552년부터 중국의 북제(北齊)와 갈등을 빚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 종족인 돌궐(突厥)과도 지속적으로 충돌했으므로, 한강 유역 회복을 위한 적극적인 시도를 할 수 없었다. 고구려는 일단 신라와 비밀 협약을 맺어 한반도 방면의 위급 상황을 해소했고, 이후 백제와 신라가 한강 하류 유역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동안 북제와 돌궐 문제의 해결에 전념했다. 590년대에 이르러서야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재차 진출하려 했으나 아단성 아래에서 전사한 온달이 상징하듯이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642년 고구려를 방문해 구원을 요청한 김춘추에게 보장왕(寶臧王)이 그 대가로 신라가 과거에 점령한 마목현(麻木峴)[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의 북서 지역, 즉 한반도 중부 지역을 반환할 것을 요청한 일에서 알 수 있듯이 한강 유역을 다시 확보하려는 염원은 고구려 말기까지 이어졌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