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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비 개덕 이야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1741
한자 忠婢介德-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석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인물 설화|신이담|충비담
주요 등장인물 개덕|말금|의직|채지홍|임헌회|유희원
관련지명 진천군 문백면 파재|문백면 옥성리지도보기|문백면 봉죽리|구멍골지도보기
모티프 유형 개덕에 감복한 천지신명|정성으로 유복자를 키운 개덕|개덕의 제사를 받드는 유씨 후손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에서 개덕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충비 개덕 이야기」문화유씨(文化柳氏) 집안의 유복자가 된 유의직(柳義直)을 정성을 다해 키워 유씨 문중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는 노비 개덕(介德)에 대한 인물설화이다. 이에 유씨 후손들은 개덕의 묘를 유씨 선산에 모시고 지금까지 시사를 지내고 있다. 진천 고을의 유림들은 개덕의 충의심에 감동하여 진천현감에게 충의문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며, 유림 중 한 명인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1811~1876]가 개덕의 사적을 써서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채록/수집상황]

2004년 진천상산고적회에서 간행한 『진천의 구비문학』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효자 유희원(柳希源)[1769~?]의 조부가 유의직이니 1729년(영조 5)에 유복자로 진천군 문백면 파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명봉(鳴鳳)이 작고한 지 5개월 후에 탄생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출생한 지 백일 만에 어머니 최씨마저 세상을 떠나 유의직은 고아가 되었다.

이 집에 개덕이라는 여자종이 있었는데 동정심이 많고 의리가 강하였다. 개덕은 최씨 부인의 장례식보다도 출생한 지 백일 밖에 안 되는 유의직을 어떻게 기르느냐가 큰 문제이기에 남편 말금(末金)과 상의를 했다. “여보 만일에 이 아기님이 살지 못한다면 유씨 가문은 무후(無後)가 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오. 우리가 이 댁에 와서 있는 이상 유씨 가문의 대를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가 아니겠소.”라고 말했다.

남편 말금이도 조용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슨 좋은 방도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개덕은, “여보 우리가 낳은 자식이 아기님보다 며칠 먼저 출생하였으니 우리 자식을 내가 기르지 않는다면 아기님을 기를 수가 있지 않겠소. 그러니 당신은 우리 자식을 데리고 구멍골로 가서 움을 파고 기르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라고 말했다.

말금은 그 말이 그럴 듯했지만, “남자는 젖이 나지 않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오.”라고 말했다. 개덕은 미리 결심한 바가 있기에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가 앞으로 또 아기를 낳으면 되지 않겠소. 만일에 이 아기님이 살지 못한다면 유씨 가문은 어떻게 되겠소. 우리 자식이야 어떻게 되건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말고 유씨 가문을 위하여 아기님을 잘 길러 드리도록 합시다.”라고 했다. 자기 아들을 희생시키더라도 유씨 가문의 아기를 잘 길러야겠다는 아름다운 마음씨는 말금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이리하여 개덕 부부는 합의하였다.

최씨 부인의 장례를 마친 후에 개덕은 아기의 양육에 힘을 썼다. 말금은 구멍골로 가서 움을 판 뒤에 아기를 안고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아기는 젖을 달라고 울기만 했다. 이에 말금이 날마다 애를 태우고 있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3일째 되는 날 젖이 붓기 시작하더니 유도가 돌기 시작했다. 개덕의 지성에 천지신명까지도 감동한 것이다. 참으로 신기하기만 했다.

개덕은 말금이가 자기 아들을 안고 구멍골로 가던 날 뒤꼍에 정결하게 단을 모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추우나 더우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기님이 잘 자라게 해달라고 지성껏 기도를 올렸다. 개덕의 마음은 오직 유의직을 잘 양육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조금만 열이 있어도 약을 구해서 먹였다. 조금만 울어도 비위를 맞추기에 많은 애를 썼다. 지성이면 천지신명이 감동한다는 말과 같이 유의직은 별다른 탈 없이 잘 자랐다.

유의직의 조상님 제삿날이 되면 정성을 다하여 제수를 장만했다. 자정이 되면 진설을 한 뒤에 절을 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는 유의직을 안고 슬프게 곡을 했다. 개덕의 지극한 정성으로 궐사(闕祀)를 한 적이 없었다. 5~6세가 되었을 때 제삿날이 되면 오늘은 어느 어른의 제삿날이다. 이 어른께서는 이러이러하신 어른이었다고 자상하게 설명을 하였다. 이리하여 조상님의 음덕을 입어 아무 병도 없이 잘 자랐다. 유의직이 비위에 맞지 않는 일이 있어서 울면 개덕은 비위를 맞추기에 많은 애를 썼고 같이 울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울음을 그치면 개덕도 울음을 멈췄다.

어느 날이었다. 유씨 문중의 먼 친척 되는 사람이 왔다. 개덕은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런데 개덕을 보고서 논밭의 일부를 떼어서 팔라는 것이었다. 유복자로 탄생하여 크는 아기가 있으니 자기 마음대로 논밭을 처리할 수가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일가벌이 되는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아랫동네에 사는 사람이 와서 논밭을 팔라고 생떼를 썼다. 개덕은 그 사람과 말다툼을 하였다. 그러나 악한은 듣지 않으므로 개덕은 즉시 봉암(鳳岩) 채지홍(蔡之洪)[1683~1741] 선생을 찾아가서 자상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봉암 선생은 파재까지 와서 악한을 불러 놓고 야단을 하였다. 그 사람은 꿇어앉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잘못했다고 사죄를 하였다. 그 뒤부터 논밭을 팔라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그 후 유의직의 학문이 늦어질까 염려하던 개덕채봉암 선생을 찾아가서 수학하기를 간청하였다. 채선생은 개덕의 정성을 칭찬하면서 승낙하였다. 유의직의 나이는 겨우 7세였다. 파재에서 봉죽리까지는 15리나 된다. 개덕은 날마다 유의직을 업고 봉죽리까지 왕래하였다. 유의직은 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에 학문의 이치를 빠르게 깨달았다.

어느 날 말금이가 구멍골에서 집으로 왔다. 개덕을 보고 말하기를, “우리가 비복 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소. 깊은 산중에 가서 화전민으로 얼마동안 있다가 우리의 본색이 묻혀 진 뒤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 비복 생활을 면하게 된다 하니 우리 그렇게 합시다.”라고 했다.

그 말에 개덕의 마음이 움직일 이치가 없었다. 개덕이 조용히 말을 하였다.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은 비복 생활을 면하는 데 있지 않소. 나의 소원은 유씨 가문을 빛내주는 데 있소. 내가 유씨의 종산 하발치에 묻혀서 벌초를 하여 주는 사람도 없이 묵묘가 된다 하더라도 유씨 집안의 대만 잘 잇게 된다면 나의 소원은 다한 것이오. 당신이 만일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대답하였다. 말금은 개덕의 마음이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임을 알자 아들을 데리고 충주 방면으로 가 버렸다. 그 뒤에 말금의 종적은 전혀 알 길이 없게 되었다.

유의직이 차츰차츰 장성하여 가정 일을 돌보게 되자 개덕은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을 하였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물건을 가리키며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자상하게 말하여 주었다. 그리고는 “여기에 있는 물건이 모두 조상님 때부터 내려오는 물건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생전에 손수 만지시던 귀중한 물건입니다.”라면서 설명을 했다. 개덕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물건은 숟가락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잘 간직하여 두었다. 또 논밭 문서를 내어 놓고 이 논은 어디에 있고 저 밭은 어디에 있으며 소작인은 누구이고 도조는 얼마를 받는다고 자상하게 설명하였다. 유의직은 5남 3녀를 두었으며 증직으로 좌승지의 벼슬을 받았다.

개덕의 묘는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무사골 유씨 선산에 있다. 유씨 가문을 위하여 일평생 몸을 바친 개덕을 위하여 유씨의 후손들은 조상과 다름없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는 시사를 지내고 있다. 개덕의 정의에 불타는 거룩한 마음은 유씨 문중에서 길이길이 빛나고 있다.

진천 고을의 여러 유림들은 개덕의 충의심에 감동하여 현감에게 글을 내어 충비(忠婢)로서의 상을 받았다. 개덕이 죽은 뒤에 군내에 있는 여러 유림들은 충의문을 세우려고 여러 번 글을 썼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고산 임헌회 선생이 충의문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지만 역시 이루지 못하였다. 임고산 선생이 쓴 개덕의 사적은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모티프 분석]

「충비 개덕 이야기」의 주요 모티프는 ‘개덕에 감복한 천지신명’, ‘정성으로 유복자를 키운 개덕’, ‘개덕의 제사를 받드는 유씨 후손’ 등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천지신명이 감동하여 젖이 나왔다는 신이담이며, 자신의 아들은 도외시하고 자신의 자식보다 더 온갖 정성으로 상전의 유복자 유의직을 키웠다는 충비담이기도 하다. 「충비 개덕 이야기」는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청풍김씨(淸風金氏) 집안의 「충비 삼월(三月) 이야기」와 유사하다. 충비가 주인댁의 후사(後嗣)를 위해 헌신했다는 일화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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