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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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村先生文集跋 |
영어공식명칭 | Bongchonseonsaeng Mungipbal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영호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825년 - 「봉촌선생문집발」서찬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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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05년 - 「봉촌선생문집발」서찬규 사망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10년 - 「봉촌선생문집발」간행 |
배경 지역 | 「봉촌선생문집발」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성격 | 서발류|발문 |
작가 | 서찬규 |
[정의]
근대 시기 학자인 서찬규가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활동하였던 조선 후기 학자인 최상룡 문집에 부친 발문.
[개설]
서찬규(徐贊奎)[1825~1905]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자는 경양(景襄), 호는 임재(臨齋)이다. 1846년(헌종 12)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수동재(守東齋)를 지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 조병덕(趙秉悳)·최익현(崔益鉉) 등과 교류(交流)하면서 경전(經典)에 대한 질의와 한말의 사회·정치적 문제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최상룡[1786~1849]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달성(達城)의 강동(江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출생했다. 최상룡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메웠다. 당시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그림이나 도표 따위로 그려 보임]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을 깊이 연구해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
[구성]
「봉촌선생문집발」은 『봉촌집(鳳村集)』의 성격을 밝히는 단락, 최상룡의 학문을 칭송하는 단락, 발문을 쓰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봉촌선생문집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봉촌선생집(鳳村先生集)』은 옛날 태학생 최공[최상룡]의 저술이다. 저서엔 선비의 뜻이 있었으나 당대의 정무를 맡는 일에는 불우하였다. 공의 도를 구하는 뜻은 이미 이른 나이에 그 뜻이 부지런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당시 세상에 부합되지 못함은 유독 어째서인가. 슬프도다. 공[최상룡]은 일찍이 입재 정종로 선생을 사사(師事)하였고, 매산 홍직필 선생을 따라 노닐 때에 자주 공의 경술을 칭찬하니 공의 공다워짐을 이에 볼 수 있었다.
지금의 학문에는 세 부류가 있다. 이름을 숨기고 실체가 없는 거짓된 학문과 언전(言詮)에 친압하며 입으로만 하는 학문과 자기의 재지(才智)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세속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삼가는 학문이 있다. 온 세상이 도도하여 함께 변화되어 이 때문에 군자(君子)와 유자(儒者)라 할 만한 이들이 드물다. 공은 전전긍긍하며 몸과 마음을 기르고, 발과 눈이 모든 곳에 이르러 거리낌 없이 육경에 힘써 쉬지 않았다. 제자백가서는 그 정밀함을 연구하고 사상을 깊게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고,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것을 파내고 번다한 것을 축출하지 않음이 없었다.
공의 손자 정일[채정일]은 나[서찬규]와 향정에 살며 집안 대대로 교분을 맺어본 사이이다. 발문의 작성을 사양하고 싶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공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기약하고 권면해주신 적이 많아 차마 사양할 수 없었다.”
[특징]
「봉촌선생문집발」은 최상룡의 구도지지(求道之志)를 통해 문집의 성격을 밝히고, 군자다운 학문을 추구한 최상룡을 칭송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봉촌선생문집발」은 최상룡 평생의 공업(功業)을 한 편의 발문을 통해 핵심적으로 드러내었다. 또한 『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을 활용해 최상룡이 학문하는 자세를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