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3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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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象龍 墓誌銘 |
영어공식명칭 | Epitaph of Choi Sang-y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영호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896년 - 「최상룡묘지명」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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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지역 | 「최상룡묘지명」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성격 | 비지류|묘지명 |
작가 | 이정관 |
[정의]
조선 후기 학자이며 예산현감이었던 이정관이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일대에서 활동한 최상룡을 위해 지은 묘지명.
[개설]
최상룡[1786~1849]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자는 덕용(德容), 호는 봉촌(鳳村)이다. 최상룡은 달성(達城)의 강동(江洞)[현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서 출생했다. 최상룡은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구했다. 세상이 어지러워 분경(奔競)[엽관운동]이 심해짐을 보고 향리로 돌아와 독암서당(讀巖書堂)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니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문전을 메웠다. 당시 대학자인 홍직필(洪直弼)·유치명(柳致明)·김익동(金翊東) 등과 경전과 예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경전(經典)의 주요 내용을 도시(圖示)[그림이나 도표 따위로 그려 보임]하여 맥락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성리학과 훈고학을 깊이 연구해 「사서변의(四書辨疑)」·「재이록(在邇錄)」·「소학췌의(小學贅疑)」·「계몽차의(啓蒙箚疑)」·「정주서변의(程朱書辨疑)」 등 많은 논문을 남겼다. 저서로는 『봉촌문집(鳳村文集)』 22권이 있다.
[구성]
이정관(李正觀)이 「최상룡묘지명」을 적었다. 「최상룡묘지명(崔象龍墓誌銘)」는 서문(敍文)과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상룡묘지명」의 서문에는 지은이 이정관과 최상룡과의 인연, 묘지명을 짓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최상룡의 세계(世系)를 소개하고 있다. 최상룡의 아름다운 품성과 최상룡이 쌓아올린 공적을 나열하고, 가계(家系)를 소개하며 서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내용]
「최상룡묘지명」전문이다.
봉상천인(鳳翔千仞)[천 길 위를 날던 봉황]/산유시용(山有是容)[팔공산 자락에 깃들었구나]/
숙거사지(孰居似之)[누가 거처하며 살았던가]/유미최공(有媺崔公)[아름다운 최공이 있었다네]/
부채저외(符彩著外)[찬란한 문채 밖으로 드러났고]/중유충적(中有充積)[안으로는 충적된 바 있었네]/
불약둔장(不若遁藏)[재주를 감추어 숨어살 수는 없었으나]/외시정직(畏是正直)[정직(正直)에 심복(心腹)한 것이라네]/
심득궁행(心得躳行)[마음먹으면 몸소 실천한 것은]/세선기실(世鮮其實)[세상에서 실로 하기 어려운 것이라네]/
내외주빈(內外主賓)[내외의 주빈들이]/해득해실(奚得奚失)[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달성지록(達城之麓)[달성의 산자락에]/유흘부당(有屹斧堂)[높직하게 솟은 무덤이 있네]/
아작명시(我作銘詩)[내가 명(銘)을 지어]/이발유광(以發幽光)[은덕의 유광(幽光)을 발하리라]
[특징]
「최상룡묘지명」은 4자(字) 16행으로 최상룡의 삶을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최상룡묘지명」는 이정관이 최상룡과 홍직필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던 인연과 묘지명을 쓰게 된 경위가 매우 상세하다.
[의의와 평가]
「최상룡묘지명」는 시경체의 문투로 작성되었다. 최상룡과 교유한 학맥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