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2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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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翊 |
영어공식명칭 | Oh Ik |
이칭/별칭 | 필보(弼甫),월강(月岡),묵재(默齋)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미엽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묘단이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개설]
오익(吳翊)[1574~1618]의 본관은 동복(同福)이며, 자는 필보(弼甫), 호는 월강(月岡) 또는 묵재(默齋)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했다.
[가계]
오익의 아버지는 우참찬 오억령(吳億齡)이며, 어머니는 홍일운(洪日雲)의 딸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할아버지는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 오세현(吳世賢)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상서원 직장(常瑞院直長) 오극권(吳克權)이다. 동생은 오정(吳靖)이다.
[활동 사항]
오익은 1603년(선조 36) 식년시에 을과로 급제한 뒤 예문관 봉교(禮文館奉敎)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어 임진왜란 때 불탄 실록의 재간행에 참여하였다. 1604년 예문관 검열, 1605년 예문관 대교(禮文官待敎)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를 거쳐 1606년엔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 전적과 병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사간원 정원과 홍문관 수찬을 지냈으며, 1609년 병조 정랑(兵曹佐郞) 겸 지제교(知製敎)로서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2년 병조 정랑과 홍문관 부수찬을 지냈고, 1614년 검상(檢詳)이 되었다. 1615년 의정부 사인과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주청사(奏請使) 박홍구(朴弘耉)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8년 아버지 오억령의 상을 당해 지나치게 슬퍼하다 장례도 다 치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오익은 글씨에 능하여서 1612년(광해군 4) 함흥(咸興)에 『조선 환조 정릉 신도비(朝鮮桓祖定陵神道碑)』를 다시 세울 때 비문을 썼다.
[묘소]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오익의 단(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