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14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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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邱 東區- 性理學- 遺物 遺籍- |
영어공식명칭 | Relics·Historic Sites and Neo-Confucianism of Dong-gu, Daegu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구본욱 |
[정의]
대구광역시 동구의 성리학과 성리학자 그리고 유적·유물.
[동구뿐 아니라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서원, 연경서원]
대구광역시 동구는 시내의 중심지인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신암동에서 동쪽으로는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 안심지역을 포함하고, 북쪽으로는 팔공산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이곳에는 1563년(명종 18)에 건립된 대구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硏經書院)이 있었다. 그래서 대구광역시 동구는 대구 성리학의 출발점이자 산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경서원의 명칭은 지명에서 취하였는데, 「연경서원기문(硏經書院記文)」에 의하면 “아래에는 무태마을이 있고 위에는 지묘마을이 있다”고 하였다. 무태는 동변동과 서변동으로 대구광역시 북구에 속하고, 지묘는 지묘동으로 대구광역시 동구이다. 『대구장적(大丘帳籍)』에 의하면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은 조선시대에도 대구부(大丘府) 동하면(東下面)[지금 대구광역시 북구]에 소속되기도 하였고, 대구부 해서촌면(解西村面)[지금 대구광역시 동구]에 소속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연경동이 대구광역시 북구에 소속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연경서원이 북구에 있었던 서원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연경서원은 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었다. 연경서원의 서쪽에 있는 화암(畫巖)을 중심으로 대구광역시 북구 연경동과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이 나누어진다.
조선 중기 연경서원에서 공부하였던 곽재겸(郭再謙)[1547~1515]이 서원을 창건한 사람 중 하나인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5] 선생에게 한 제문」에 의하면 연경서원을 “지묘(智妙)의 물가에 지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연경서원이 있었던 지역을 지묘동이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곳을 서원마을 혹은 서원연경이라고 한다. 연경서원은 대구광역시 동구뿐 아니라 대구지역 전체를 통할하여 교육을 실시하던 대표적 서원이다.
대구지역의 성리학은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도입된 시기인 고려 말부터 나타난다. 그 선구자는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시호 정의(貞義)]와 학암(鶴巖) 서균형(徐均衡)[1340~1391, 시호 정평(貞平)], 파계(巴溪) 전백영(全伯英)[1345~1412,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채귀하·서균형·전백영은 모두 현재 대구광역시에서 출생하여 고려 말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아간 사람이다. 채귀하는 정몽주와 함께 조정에 종사하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72현의 한 명이다. 서균형은 고려조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는데 조선이 개국하기 1년 전에 타계하였다. 전백영은 고려조에 주로 간관(諫官)으로 있었는데, 조선이 개국하자 출사하여 태종 때 경상도 관찰사와 예조판서, 의정부 지사 등을 역임하였다. 대구지역에 성리학을 연 전경창은 전백영의 5세손이고, 채응린은 채귀하의 7세손이다. 서사원은 서균형의 후손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성종 대에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1420~1488], 도하(都夏)[1418~1479], 중종 대 대봉(大峯) 양희지(楊熙止)[1439~1504]가 문과에 합격하여 조정에 출사하였다. 그렇지만 대구지역뿐 아니라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성리학의 문풍을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 문풍은 연경서원이 창건됨으로써 형성되었다. 연경서원에서는 대구지역의 유림(儒林)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강학[교육]인 통강(通講)을 실시하였다. 이 통강으로 인하여 제1, 2, 3세대가 나타나 대구지역의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모두 사승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제1세대는 연경서원을 창건한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과 만년에 대구의 사수(泗洙)지역으로 이거(移居)한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들 수 있다. 제2세대는 1세대로부터 강학을 받았던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연정(蓮亭) 유요신(柳堯臣),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태암(苔巖) 이주(李輈) 등이다. 이들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연경서원을 중건하였으며 통강(通講)을 실시하여 대구지역 성리학의 르네상스시기를 열게 하였다. 제3세대 유학자는 제2세대 성리학자로부터 교육을 받았던 사람은 137명에 이른다. 이후 대구지역의 문풍은 이들과 그 후손들에 의하여 계승되어 대구지역을 문향(文鄕)의 고장이 되게 하였다.
[동구 지역 대표적 성리학자]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 거주하였던 유림(儒林)들 중에서 사마시(司馬試)[생원, 진사] 와 문과(文科)에 합격한 사람, 문집이나 저술 등이 있는 성리학자들을 시대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성리학자들의 정보는 [문]은 문집, [실]은 실기, [통]은 통강록에서 가져왔다.
1. 15세기
15세기 대표적 성리학자는 정수충(鄭守忠)[1401~1469] 이다. 정수충의 시호 문절(文節)이고,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에 거주했으며 관직은 판중추부사이다.
2. 16세기
16세기 대표적 성리학자는 이수천, 채응린, 곽재겸, 유요신, 채선각, 배극념 등이다. 이수천(李壽千)[1528~?]은 호가 매정(梅亭), 백안동에 거주했으며, 관직은 연안부사이다. 채응린(蔡應麟)[1529~1584]은 호가 송담(松潭),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거주했고, 관직은 생원이다.[실] 곽재겸(郭再謙)[1547~1615]은 호가 괴헌(槐軒),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고, 관직은 통정대부이다.[문, 통] 유요신(柳堯臣)[1550~1618]은 호가 연정(蓮亭),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통] 채선각(蔡先覺)[1551~1581]은 호가 동호(東湖),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거주했다. 배극념(裵克念)[?~?]은 호가 우옹(愚翁),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거주했다. 최인(崔認)[1559~?]은 호가 한천(寒泉),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문] 최응담(崔應談)[1564~1593]은 호가 회당(晦堂), 대구광역시 동구 반야월에 거주했다.[실]
3. 17세기
17세기 대표적 성리학자는 최동보, 이사경, 서시립, 황경림, 최계, 유시번, 채선길, 배경가, 유사온, 채선견, 곽용, 최동립, 최동률, 최동집, 곽후창, 이휴운, 최동직, 최위남, 이석번, 이석필, 최진남 등이다. 최동보(崔東輔)[1560~1625]는 호가 우락재(憂樂齋),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실] 이사경(李士慶)[1563~1628]은 호가 단암(檀巖),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지저동에 거주했다. 서시립(徐時立)[1566~1628]은 호가 전귀당(全歸堂),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고, 관직은 참봉이다.[문, 통] 황경림(黃慶霖)[1566~1629]은 호가 면와(勉窩), 대구광역시 동구 동내동에 거주했다.[실]
최계(崔誡)[1567~1622]은 호가 태동(台東),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만경현령이다.[실] 유시번(柳時藩)[1569~1640]은 호가 사월당(沙月堂),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부동에 거주했다.[문, 통] 채선길(蔡先吉)[1569~1646]은 호가 금탄(琴灘),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거주했다.[문] 배경가(裵褧可)[1570~1650]는 호가 달천(達川), 신달,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거주했다.[통] 유사온(柳思溫)[1573~1639]은 호가 귀정(龜亭),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에 거주했다.[문, 통]
채선견(蔡先見)[1574~1644]은 호가 양전헌(兩傳軒),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진사이다.[문, 통] 곽용(郭涌)[1578~1616]은 호가 유계(柳溪),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생원이다.[통] 최동립(崔東岦)[1582~?]은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통] 최동률(崔東嵂)[1585~1622]은 호가 다천(茶川),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진사이다.[실, 통] 최동집(崔東㠍)[1586~1661]은 호가 대암(臺巖), 둔산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진사, 대군사부이다.[문, 통] 곽후창(郭後昌)[1596~1667]은 호가 농포(農圃),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현감이다. 이휴운(李休運)[1597~1668]은 호가 석병(石屛), 대구광역시 동구 입석동, 지저동에 거주했다.[문] 최동직(崔東)[1602~1665]은 호가 향암(香巖),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진사이다. 최위남(崔衛南)[1611~1662]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생원이다. 이석번(李碩蕃)[1617~1681]은 호가 희졸헌(喜拙軒), 대구광역시 동구 내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부사이다.[문] 이석필(李碩苾)[1620~?]은 내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진사이다. 최진남(崔鎭南)[1626~1683]은 호가 휴운(休軒), 도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진주목사이다.[문]
4. 18세기
18세기 대표적 성리학자는 손홍주, 손초박, 최경식, 남명신, 최흥원. 최주진, 곽원택, 남석로, 최항진 등이다. 손홍주(孫弘胄)[1637~1704]는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장악원정이다. 손초박(孫楚璞)[1658~1717]은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호조참의이다. 최경식(崔慶湜)[1660~1716]은 호가 명곡(明谷),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장령이다.[문] 남명신(南命新)[1698~1772]은 호가 용암(龍菴),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에 거주했다.[문] 최흥원(崔興遠)[1705~1786]은 호가 백불암(百弗庵),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익위사 익찬이다.[문] 최주진(崔周鎭)[1724~1763]은 호가 동계(東溪),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거주했다.[문] 곽원택(郭元澤)[1734~1797]은 호가 졸옹(拙翁),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 남석로(南碩老)[1729~1774]는 호가 예연(禮淵),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현령이다.[문] 최항진(崔恒鎭)[1738~?]은 호가 단고(丹皐),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거주했다. 문과 출신이다.
5. 19세기
19세기 대표적 성리학자는 최화진, 채필훈, 최식, 최효술, 최상룡, 여사백 등이다. 최화진(崔華鎭)[1752~1813]은 호가 칠실(漆室),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거주했다.[문] 채필훈(蔡必勳)[1759~1838]은 호가 금와(琴窩),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거주했다.[문] 최식(崔湜)[1762~1807]은 호가 근재(近齋),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거주했다.[문] 최효술(崔孝述)[1786~1870]은 호가 지헌(止軒),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 거주했다.[문] 최상룡(崔相龍)[1789~1849]은 호가 봉촌(鳳村),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거주했다.[문] 여사백(呂師伯)[1829~1900]은 호가 눌암(訥庵), 대구광역시 동구 부동에 거주했다.[문]
6. 20세기
20세기 대표적 성리학자는 서영곤, 구연우, 최정한, 채귀해, 우효설, 채헌식, 구태서, 채황원 등이다. 서영곤(徐永坤)[1831~1913]은 호가 겸산(兼山),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거주했다.[문] 구연우(具然雨)[1843~1914]는 호가 금우(琴愚), 대구광역시 동구 신평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홍문관 시학이다.[문] 최정한(崔廷翰)[1845~1909]은 호가 만오(晩悟),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거주했다.[문] 채귀해(蔡龜海)[1850~1905]는 호가 치헌(癡軒),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거주했다.[문] 우효설(禹孝卨)[1854~1935]은 호가 녹봉(鹿峯),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에 거주했다.[문] 채헌식(蔡憲植)[1855~1933]은 호가 후담(後潭),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거주했다.[문] 구태서(具泰書)[1864~1943]는 호가 돈와(遯窩), 대구광역시 동구 신평동에 거주했다. 관직은 의금부 도사이다.[문] 채황원(蔡晃源)[1883~1971]은 호가 시헌(時軒),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거주했다.
[대구 동구 지역에서 출사한 대표적 성리학자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분을 살펴보면 채응린과 곽용, 최위남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채선견, 최동률·최동집·최동직 3형제, 이석필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여기에서 채선견은 채응린의 아들이고, 최위남은 최동집의 아들이다. 문과에 합격한 분으로는 정수충, 이수천, 곽후창, 이석번, 최진남·최경식 부자, 남석로, 최항진 8명이다. 최계는 무과에 합격하여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곽재겸은 임진왜란 때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제수되었으며, 최동집은 천거를 받아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최흥원은 효행으로 통정대부 익위사익찬(翊衛司翊贊)에, 손홍주는 천거로 통정대부 장악원정(掌樂院正)과 손초박도 천거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제수되었다. 구연우·구태서 부자는 학행과 천거로 통정대부 홍문관(弘文館) 시학(侍學)과 통훈대부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에 제수되었다. 채선각은 대구십현(大邱十賢)에 보이는데 31세로 타계하였고, 배극념은 배경가의 부친으로 이주(李輈)[1556~1604]가 칭한 당시 육군자(六君子) 중의 한 분이다.
최주진, 최식, 최효술은 최흥원의 아들, 손자, 증손자로 학문이 있었다. 최화진, 최상룡, 최정한은 최동집의 후손이며, 최동립은 최인의 아들이며, 채필훈, 채귀해, 채헌식, 채황원은 채응린의 후손으로 모두 학문이 있었다. 곽원택은 곽재겸의 후손으로 1774년(영조 50)에 연경서원을 동쪽으로 40보 되는 지점으로 이건할 때 큰 역할을 하였다. 이휴운, 남명신, 여사백, 서영곤, 우효설 또한 문학이 있었다.
[대구 동구 지역에 남아 있는 대표적 성리학 저술과 사상]
대구광역시 동구에 거주했던 성리학자들은 거의 다 문집이나 실기가 있다. 그러나 조선 중·후기 대구지역의 유학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성리학과 관련되는 저술은 적다. 이것은 이기(理氣)의 이론적인 측면보다 수양(修養) 등 실천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곽재겸, 채흥원, 채상룡, 구연우의 저술에 보이는 성리학 관련 저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은 「훈자질십육도(訓子姪十六圖)」를 저술하였는데 목록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독서도(讀書圖)」, 「효제도(孝悌圖)」, 「오륜도(五倫圖)」, 「존성도(存省圖)」, 「구용구사도(九容九思圖)」, 「염계선생태극도(濂溪先生太極圖)」, 「횡거선생서명도(橫渠先生西銘圖)」, 「회암선생인설도(晦庵先生仁說圖)」, 「임은정씨심학도(林隱程氏心學圖)」, 「사친도(事親圖)」, 「신종도(愼終圖)」, 「육예도(六藝圖)」, 「사단칠정도(四端七情圖)」, 「시제도(時祭圖)」, 「설찬도(設饌圖)」, 「기제도(忌祭圖)」, 「묘제도(墓祭圖)」 등이 있다. 이 가운데에서 「염계선생태극도」, 「횡거선생서명도」, 「회암선생인설도」, 「임은정씨심학도」, 「사단칠정도」는 성리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저술이다. 또한 퇴계가 『성학십도(聖學十圖)』에서 언급한 내용이기도 하다. 위의 도(圖) 전후(前後)에는 곽재겸의 소서(小序)와 손자 곽후립(郭後立)과 7세손 곽원택(郭元澤)의 발문(跋文)이 있다. 곽원택이 이 도(圖)에 대해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에게 문의하니 “부지런히 힘쓴 마음이 매우 엄격하여 말학(末學)이 쉽게 엿볼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백불암 최흥원은 성리학과 관련되는 저술이 보이지 않는데, 백불암의 제자들이 기록한 언행록에서 찾을 수 있다. 백불암 최흥원은 22세에 「태극도(太極圖)」, 「통서(通書)」, 「서명(西銘)」을 연구한 적이 있다. 백불암은 주리론(主理論)을 추구하면서도, 이기(理氣)를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봉촌(鳳村) 최상룡(崔相龍)은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추구하였다. 최상룡은 경서를 연구하여 『소학췌의(小學贅疑)』, 『사서변의(四書辨疑)』, 『계몽차의(啓蒙箚疑)』를 저술하였다. 『사서변의』에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전체에 걸쳐 의심나는 조목을 열거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계몽차의』는 퇴계의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연구한 것이다.
금우(琴愚) 구연우(具然雨)는 「성균관 중용문목(成均館中庸問目)」, 「성균관 대학문목(成均館大學問目)」이 있는데 이곳에서 『중용』과 『대학』에 대하여 도(圖)로써 요약하고 있다. 그 중에서 최석기는 구연우의 「중용유조핵지도(中庸喩棗核之圖)」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도(圖)는 중용의 요지를 대추씨[칠계(棗核)]에 비유하여 그린 것이다. 대추씨 모양의 타원형 속에 네모를 세로로 배열하여 각 단락의 요지를 적어 넣었다. 이를 통해 그 특징을 살펴보면 저자는 중용을 5대절(大節)로 나누어 파악하고 있다. 이 설이 주희(朱熹)의 『중용장구』의 4대지설(四大旨說)과 다른 점은 제1대지의 제1장을 독립시켜 제1대절로 하고, 제2장부터 제11장까지를 제2대절로 나눈 것이다. 또 성(性)·도(道)·교(敎)를 횡으로 나란히 표기하고 중간에 중극(中極)·중화(中和)를 배열하였는데, 성(性)·도(道)사이에 중극을 배열한 것이 독특하다.”
[동구에 남아 있는 성리학 유적과 유물]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는 성리학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상당수 있다. 그 중 연경서원, 『대구유현통강록(大邱儒賢通講錄)』, 대구 백불암 고택 등은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다.
1. 연경서원(硏經書院)
연경서원옛터는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다. 이곳은 지금 택지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연경서원은 대구광역시 최초의 서원으로 대구를 문향이 되게 한 서원이다. 1563년(명종 18)에 건립되어 29년 후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602년(선조 35)에 중건하였으며 1774년(영조 50)에 홍수로 사당이 훼손되자 1년에 걸쳐 동쪽으로 40보 되는 지점으로 이건하였다. 1871년(고종 8)에 이르러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2011년에 연경서원 복원운동이 전개되어 2016년 6월에 대구광역시에서 실시한 「연경서원 복원 타당성 조사 및 활용방안 연구용역」이 마무리되었다.
2. 『대구유현통강록(大邱儒賢通講錄)』
『대구유현통강록』은 1605년부터 1613년까지 연경서원에서 교육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대구유현통강록』에는 연경서원에서 행한 교육의 내용과 학생의 명단, 출결, 평가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학적부에 해당한다. 『대구유현통강록』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서원의 교육자료 중에서 가장 완벽한 자료로 조선시대 서원교육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백불암 종가에 소장되어 있다.
3. 대구 백불암 고택
대구 백불암 고택은 조선 후기 성리학자 최흥원(崔興遠)의 고택이다. 경주최씨 종가댁은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에 있는데 백불고택(百弗古宅)이라고 편액되어 있다. 정침(正寢)인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랑채는 수구당(數咎堂)이다. 동쪽에 제청(祭廳)인 보본당(報本堂)이 있는데, 이곳에서 유형원(柳馨遠)이 『반계수록(磻溪隧錄)』을 교정하였다. 보본당의 뒤편에는 입향조 대암(臺巖) 최동집의 불천위 사당과 가묘(家廟)가 있다.
이밖에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채선견이 건립한 성재서당(盛才書堂), 대구광역시 동구 부동에 유시번이 건립한 월천재(月川齋),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채상룡이 건립한 봉무정(鳳舞亭)이 있다. 또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는 효자 서시립을 봉안한 백원서원(百源書院)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공산의진군을 결성을 왜적을 물리친 성리학자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구지역의 유림지도자와 백성들은 팔공산과 비슬산 등지로 피난하였다. 두 달 후 8월 12일[음력 6월 7일]에 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에 있는 부인사(夫仁寺)에서 향회(鄕會)[유림총회]를 열어 대구지역 의병, 즉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였다. 이때 곽재겸은 해안면(解顏面) 상향리(上香里), 동촌리(東村里), 서부리(西部里), 북촌(北村), 서촌(西村) 5면(面)의 도대장(都大將)을 맡았으며, 유요신은 해안 북촌 의병장을, 이사경은 서부리 유사(有司)를 맡았다.
최인, 최동보, 최계 3명 숙질(叔姪)은 임진왜란 최씨3충(忠)으로 불리는데, 최인과 최동보는 황경림, 최응담 등과 해안, 반야월 등지에서 왜적과 전투를 하였으며 팔공산 회맹에도 참여하였다. 또 유시번은 공산의병소(公山義兵所)에서 부친 유요신의 군무(軍務)를 도왔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광역시 및 동구 지역 성리학의 확산과 연경서원의 역할]
송담 채응린은 계동 전경창,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1530~1593]과 더불어 대구유학[성리학] 의 3명 중 한 사람이다. 채응린은 1555년(명종 10) 27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을사사화의 영향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에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송담은 퇴계학(退溪學)을 추구하였는데 1580년(선조 13) 52세 되는 해에 곽재겸, 유요신과 함께 도산서원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그가 지은 시문(詩文)이 거의 다 소실되고 다만 시 5수가 전해오고 있다. 송담의 학문은 서사원(徐思遠)[1550~1615]과 곽재겸, 유요신, 배경가, 아들 채선길과 선견에게 전하여져 대구 성리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여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임진왜란이 종결(1598)되자 대구지역의 유림들은 맨 먼저 교육기관인 대구향교[1599]와 연경서원[1602]을 중건하였다. 연경서원에서는 1605년(선조 38)부터 1613년까지 정기적인 통강(通講)을 실시하여 대구 성리학의 르네상스시기를 열게 되었다. 통강이란 유학의 독특한 공부 방법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자신이 읽은 책을 가지고 와서 스승의 앞에서 강(講)[공부한 것을 외움] 을 하여 평가를 받는 것이다. 이 통강에는 대구지역의 유림 137명이 참여하였는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의 유림으로는 곽재겸·곽용 부자, 유요신·유시번 부자, 서시립, 채선길·채선견 형제, 배경가, 유사온, 최동률·최동집 형제이다. 곽재겸과 유요신은 2세대로 스승의 위치에서 서사원, 손처눌(孫處訥)[1553~1634] 과 함께 이 강학을 주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