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후삼국시대 일어난 공산전투와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길.

[1,000년을 뛰어넘어 팔공산에서 다시 살아난 왕건길]

대구광역시 동구청은 927년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 사이에 있었던 공산전투(公山戰鬪)[동수전투(桐藪戰鬪)]와 관련된 설화, 지명 등을 바탕으로 하여 조성한 친환경 탐방로인 팔공산 왕건길을 조성했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있는 신숭겸장군 유적을 출발해 열재, 부남교, 물넘재, 백안삼거리, 평광종점, 매여종점, 초례봉, 동곡지로 이어지는 경로이다. 팔공산 왕건길은 제1길 용호상박길[4.3㎞], 제2길 열린하늘길[4.3㎞], 제3길 묵연체험길[5.4㎞], 제4길 문화예술길[3.3㎞], 제5길 고진감래길[5.2㎞], 제6길 호연지기길[5㎞], 제7길 가필환초길[3.3㎞], 제8길 구사일생길[4㎞]까지 총연장 35㎞에 달하는 8개 테마 길로 구성되어 있다.

팔공산 왕건길은 왕건이 자신 대신 전사한 신숭겸(申崇謙)을 기리고자 새웠던 지묘사(智妙寺)터에 조선시대에 만든 표충단(表忠壇)과 충열비(忠列碑)가 있는 ‘신숭겸장군 유적’, 왕건이 머물렀다는 ‘왕산(王山)’, 왕건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말했다는 ‘무태(無怠)’, 왕건이 해가 떠오르자 드디어 마음을 안심했다는 ‘안심(安心)’ 등 팔공산 왕건길을 걸으면서 공산전투에서 패배한 왕건의 시련과 역경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에는 처참했던 왕건의 탈출 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왕건이 패잔병을 이끌고 위험한 곳을 무사히 통과해서 얼굴이 밝아졌다는 ‘해안(解顔)’, 한밤중이라서 길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이 탈출로를 비춰줬다는 ‘반야월(半夜月)’, 왕건이 탈출과정에서 잠시 쉬었다는 ‘독좌암(獨坐巖)’, 나무꾼이 누추한 왕건을 보고 왕인 줄 모르고 밥을 줬는데, 나중에 나무를 하고 돌아서와 보니 왕건이 떠나고 없었다는 ‘실왕(失王)’, 왕건이 도망치다 한 마을에 도착해 보니 어른들은 도망가고 아이들만 남아있었다는 ‘불로동(不老洞)’, 왕건이 피신하면서 승려가 입는 가사로 갈아입고 도망쳤다는 ‘가사(袈裟)’, 왕건이 후백제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무사히 탈출해서 안심했다는 ‘안심(安心)’ 등 치열했던 왕건의 탈출 과정을 이 지역에 남아있는 여러 지명이 보여주고 있다.

[왕건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를 가져다 준 공산전투]

왕건은 918년 고려를 건국하였다. 건국 이후 고려는 통일된 한반도 주인이 되기 위해 후백제와 치열하게 경쟁을 하였는데, 특히 신라의 지배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던 경상도 지역에서 고려와 후백제의 경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918년 상주를 근거로 활동한 아자개(阿玆蓋)가 고려에 귀속함에 따라 경상도에 진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던 고려는 경상도 지역에서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927년 7월에는 대야성[지금 경상남도 합천군]을 확보함으로써 경상도에 대한 본격적인 공략을 시작할 수 있었다. 고려는 상주에서 낙동강을 따라 남하하는 동시에 대야성을 발판으로 낙동강을 따라 북상하여, 경상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려고 했다. 이러한 고려의 움직임에 대항해 후백제는 9월 근품성(近品城)[지금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근암리]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신라는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신라의 소식을 들은 왕건은 직접 지휘할 군사 1만여 명을 구원군으로 편성하고, 개경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후백제의 견훤은 왕건이 도착하기 전 신라의 수도인 금성[지금 경상북도 경주시]을 급습하여, 경애왕을 강제로 자살하게 하고, 신라의 마지막 왕이 되는 경순왕을 왕위에 즉위시켰다. 후백제의 금성 공격과 경애왕의 피살 소식을 들은 왕건은 크게 분노했다. 왜냐하면 당시 고려의 왕건은 신라에 적극적인 친화정책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였지만, 견훤의 신라 공격으로 인해 자신이 추진하는 경상도 지역에 대한 공략에 차질이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견훤이 영천을 거처 공산[지금 대구광역시 동구에 있는 팔공산] 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도 후백제군을 공격하기 위해 5,000여 명 군사를 이끌고 공산으로 접근하였다.

결국 고려와 후백제는 공산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공산전투의 구체적인 양상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단지 “견훤의 군사가 매우 급하게 왕을 포위하여”와 같은 단편적인 기록들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략적으로 추정해 보면,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과 팔공산 일대에서 후백제군을 공격하기 위해 매복하고 있던 고려군을 반대로 후백제군이 포위하고 섬멸하였거나 혹은 반대로 후백제군이 매복해서 고려군을 포위해서 공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군이 패배한 가장 큰 요인은 경주의 습격과 경애왕의 자살 소식을 들은 왕건이 무리해서 군사를 진군시켜 전투 시작 전 군사들의 피로가 쌓여있었다는 점과 조급한 마음으로 주변의 지형이나 적의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전투를 시작했다는 점이다.

고려군과 후백제군 사이에 여러 차례 치열하게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 남아있는 지명들과 그 유래를 보면, 고려군은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있는 파군재(破軍峙)에서 후백제군에게 크게 패배하고 그 옆에 있는 왕산으로 후퇴하였다. 이곳에서 왕건과 유사하게 생겼던 신숭겸이 왕건의 수레를 타고[혹은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김락 등과 함께 적들을 유인하는 사이 왕건은 후백제군을 피해 탈출하였다. 신숭겸은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위에 올린 1등 공신이었다는 점, 왕건이 후삼국 통일 후 신숭겸이 전사한 자리에 지묘사(智妙寺)를 건립해서 그를 추모한 점을 보면, 왕건에게는 매우 중요한 장군이었다. 이처럼 신숭겸, 김락 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탈출해야 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은 왕건에게 매우 위급하였다.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이후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을 잃은 것에 대해 깊이 상심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자신이 탈출하기 위해 여덟 명의 장군이 희생되었다고 하여 공산(公山)을 팔공산(八公山)으로 이름을 고치게 했다는 고사가 있을 정도로 왕건에게 큰 충격이었다. 수많은 장군과 군사를 잃고 또 후백제군을 피해 비참하고 처절하게 탈출해서 겨우 살아남았다는 기억은 왕건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전투와 관련된 본격적인 시련은 그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공산전투는 왕건이 단순히 군대를 잃고 힘들게 탈출하게 하였다는 의미보다 경상도 지역의 주도권이 고려에서 후백제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왕건과 고려에게 더 큰 시련을 주었다. 공산전투로 대구지역을 상실한 고려는 이듬해인 928년 5월에 경상도 남쪽에 있던 강주[지금 경상남도 진주시]를 후백제에게 상실하였고, 929년 7월에는 의성[지금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후백제군의 공격으로 김홍술(金洪術)이 전사하는 등 경상도에 대한 고려의 지배권이 급속하게 흔들리고 축소되었다. 그 결과 고려는 고창군[지금 경상북도 안동시]을 포함한 경상도 북부 지역에만 거점이 남아있는 상태가 되었고, 이곳마저 빼앗긴다면, 경상도에 대한 전체 지배권이 후백제에 넘어가게 되는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고창전투에서 공산전투의 시련을 극복하다]

후백제의 지속되는 공격과 그로 인한 여러 번 패배가 있기는 하였지만, 왕건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929년 12월에 견훤이 직접 지휘하는 후백제군이 경상도에 남은 고려의 마지막 거점인 고창군을 포위하자 왕건은 구원군을 이끌고 가던 도중 예안진(禮安鎭)[지금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에 머물며 회의를 하였다.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패배하면 어떻게 퇴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장수들에게 물을 정도로 공산전투와 그 이후 강주, 의성 등 잇따른 패배는 왕건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유금필(庾黔弼)의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지만 최후에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적극적 격려에 힘을 얻고 싸울 결심을 하였다.

이듬해인 930년 1월에 왕건의 고려군은 고창군의 병산(甁山)[지금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에, 견훤의 후백제군은 고창군의 석산(石山)[지금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에 각각 진을 치고 전투를 벌이게 된다. 여기서 왕건은 계속되었던 패배와 공산전투의 아픈 기억을 극복하고 후백제군과 견훤에게 극적으로 승리를 하게 된다. 고창전투(古昌戰鬪)라고 불리는 이 전투의 승리로 왕건은 공산전투의 패배를 설욕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 직후 영안[지금 경상북도 영천시]·하곡[지금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직명[지금 경상북도 안동시]·송생[지금 경상북도 청송군] 등 30여 군과 현이 고려에 항복하는 등 이전에 빼앗겼던 경상도에 대한 지배권을 후백제로부터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고창전투는 공산전투가 왕건에게 주었던 피해 이상을 견훤과 후백제에 주었다. 8,000여 명 군사와 수많은 장군을 잃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차지하였던 경상도에 대한 지배권 전체를 고려에게 빼앗기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투는 후삼국시대 통일하기 위한 치열했던 주도권다툼에서 고려가 후백제에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고창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고려는 935년 11월에 천년을 이어가던 신라가 항복함에 따라 경상도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듬해인 936년 2월에는 태자 신검(神劒)에 의해 유폐돼 있었던 자신의 숙적이자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사위인 박영규(朴英規)와 함께 고려에 투항해 옴에 따라 경제적·군사적인 부분만 아니라 정당성 부분에서도 우월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마침내 936년 9월에 왕건은 8만 7,500명 대군, 수많은 장군, 그리고 자신의 라이벌이자 후백제의 건국자였던 견훤을 이끌고 후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길을 나서게 된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일리천[지금 경상북도 구미시 인동]에서 후삼국시대 최후의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일리천전투 시작 직후 후백제의 좌장군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이 투항해 왔고, 고려군과 함께 있는 견훤에 의해 사기가 크게 저하된 후백제군은 고려군에게 대패했다.

[팔공산 왕건길에 남아 있는 왕건의 삶과 느림의 미학]

팔공산 왕건길은 고려의 태조이자 후삼국통일의 주인공인 왕건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경험하고 느끼도록 해주는 장소이다. 하지만 이곳은 고려를 건국하고 삼국으로 다시금 갈라져서 싸우던 한반도를 통일한 ‘영웅’인 왕건을 떠올려 주는 곳이 아니라, 부하를 잃고 도망쳐야 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장소이다. 다시 말해 팔공산 왕건길은 삼국의 최후의 ‘승리자’로서 왕건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패배자’로서의 왕건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설’이 바로 팔공산 왕건길이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이것은 우리 역사상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인 왕건도 마찬가지였다. 왕건은 계속되는 승리로 자만심에 취해 있던 상태에서 자신이 계획하였던 경상도 진출 계획이 견훤의 신라 습격과 경애왕의 피살이라는 돌발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격양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견훤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려다가 큰 피해를 입은 것이 바로 공산전투이다. 대구광역시 동구에 남아 있는 왕건과 관련된 여러 지명의 유래들을 보면 왕건은 자신이 아끼는 장군들과 병사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탈출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패배감과 도망자라는 비참한 현실을 직면했을 것이다. 그 이후 왕건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는 했지만, 견훤과 후백제의 지속적인 공격과 연속되는 패배를 경험해야만 했다. 하지만 왕건은 이러한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았다. 물론 고창전투를 앞두고 유금필의 격려로 힘을 내서 싸워서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왕건이 공산전투의 패배를 깊이 반성하고, 반면교사[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로 삼아 동일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극복하고 고창전투를 승리하여 삼국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한 상태에서도 왕건은 이전과 같이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사실상 멸망 상태에 있던 신라를 압박하지 않고, 오히려 우호적으로 대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항복하게 만들었고, 또한 후백제에 대해서도 왕건은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견훤이 투항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변의 상황과 여건을 충분히 고려하고 판단한 상태에서 후백제를 공격해서 멸망시켰다. 이러한 왕건의 모습은 공산전투에서 패배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도망쳤던 기억, 즉 팔공산 왕건길을 걸으며, 자신의 조급한 판단과 행동으로 인해 수많은 부하를 희생하게 만들었다는 후회와 반성이 바탕이 되어서 나온 것이다. 팔공산 왕건길이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생은 ‘빠르고’, ‘조급하게’ 행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여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자기 삶의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삼국통일의 영웅이자 고려의 건국자 왕건의 삶에서 특히 가장 비참한 패배와 실패의 장면을 간직하고 있는 팔공산 왕건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