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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피묘갈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21368
한자 蔡渼陂墓碣銘
영어공식명칭 Chae Mipi Myogalmyeong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73년 - 「채미피묘갈명」조긍섭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33년 - 「채미피묘갈명」조긍섭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935년연표보기 - 「채미피묘갈명」초간 발행
배경 지역 「채미피묘갈명」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지도보기
성격 비지류|묘갈문
작가 조긍섭

[정의]

근대시기 학자인 조긍섭이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세거했던 인천채씨의 후손인 채화국을 위해 지은 묘갈명.

[개설]

조긍섭(曺兢燮)[1873~1933]의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자는 중근(仲謹), 호는 심재(深齋)이다. 타고난 성품이 매우 영특하여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다. 시문에도 법도가 있어 당시 영남 사림에서 거목으로 지목되었다.

[구성]

「채미피묘갈명」은 서문(序文)과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의 서두에는 채화국 집안의 명망이 있었던 선대(先代)를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채화국의 총명한 자질과 그의 삶을 간략히 서술하고, 채화국의 가계(家系)와 창작동기를 설명하며 서문을 마무리하고 있다. 명은 4자 6행으로 단박하고 간결하게 채화국의 삶을 노래했다.

[내용]

「채미피묘갈명」채화국의 후손인 채경원이 고희를 넘은 나이에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채화국의 묘갈명을 부탁하여서 지은 묘갈명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호가 미피거사채화국인천채씨로 선대에 명망이 있는 선비들이 많다. 고려조에서 호조전서를 지냈던 채귀하(蔡貴河)와 조선조의 채응린(蔡應麟)·채선견(蔡先見)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채화국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고, 분수에 맞게 처신하는 삶의 태도를 지녔다. 공은 스스로 학문에 힘써 선비가 된 후로 마을에 선대부터 학문을 강론하던 성재서당에서 후진을 인도하고 「강규십조(講規十條)」를 지어 후진들을 독려하였다. 평소 모습에서 득실과 영욕에는 무심한 듯이 하였다. 평소 채씨 문호의 성대함이 영남 전체에 알려졌는데 근래 들어서는 예전보다 못한 감이 있었지만, 공의 선비다운 아름다운 자취가 아직까지 집안에 남아 있었다. 특출난 행적과 우뚝한 절의가 있어야 기념할 것이 아니라 가문의 법도를 고이 간직해 온 그 노고로도 충분히 기념할 가치가 있다.”

[특징]

「채미피묘갈명」은 짧은 묘지명에 가문에서의 채화국의 공(功)을 간결하게 표현하며 칭송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묘갈문의 특성상 묘갈 주인에 대한 칭송이 대부분을 이루는데, 「채미피묘갈명」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서문(序文)이 쓰였다. 오히려 이러한 조긍섭의 시각이 채화국이라는 인물의 삶을 좀 더 설득력있게 전달되는 장치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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