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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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華國 |
영어공식명칭 | Chae Hwaguk |
이칭/별칭 | 덕중(德中),미피거사(渼陂居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출생 시기/일시 | 1803년 2월 26일 - 채화국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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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863년 - 채화국 사망 |
수학|강학지 | 채화국 강학지 -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
묘소|단소 | 채화국 묘소 -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
성격 | 문인 |
성별 | 남성 |
본관 | 인천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출신 문인 학자.
[가계]
채화국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덕중(德中), 호는 미피거사(渼陂居士)이다. 조선 중기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의 후손으로, 조부는 채상겸(蔡尙謙), 부친은 채윤복(蔡允復), 모친은 창원황씨(昌原黃氏)로, 황계승(黃啓升)의 딸이다. 부인은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계렴(成啓濂)의 딸이다. 딸 셋만 두어 조카 수곤(秀坤)을 후사로 삼았다. 딸은 이능익(李能翼)·조계일(曺啓一)·이우연(李愚淵)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채화국은 1803년(순조 3) 2월 26일에 태어났다. 채화국 집안은 대구부 해북촌면(海北村面) 미대리(美岱里)[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 세거하였다. 어릴 때 매우 총명하여 몇 번만 읽고도 바로 외웠고, 13세에 기삼백(朞三百)의 뜻을 스스로 이해하였다. 성장하면서 과거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향시에는 합격했는데 남성시(南省試)에는 탈락하였다. 이때부터 과거 공부를 그만두었다. 마을에 선대부터 학문을 강론하던 성재서당(盛才書堂)이 있었는데, 항상 그곳에서 생활하며 후진들을 인도하고 강규(講規) 10조를 지어 독려하였다. 성재서당은 인조 때의 학자인 채선견(蔡先見)[1574~1644]이 만년에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후손들이 선조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중수한 다음 ‘성재서당’으로 바꾸었다. 채화국은 백씨와 함께 계를 만들어 조상 제사를 받들고 가난한 친족을 구제하는 데 노력하였다. 1863년(철종 14)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묘소]
채화국의 묘소는 대구부 해서(解西) 외남촌(嵬南村)[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