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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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柱南 |
영어공식명칭 | Gwak Junam |
이칭/별칭 | 맹견(孟堅),겸재(謙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황동권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출신 문인 학자.
[가계]
곽주남의 본관은 포산(苞山), 자는 맹견(孟堅), 호는 겸재(謙齋)이다. 고려 시대 금오위 교위(金吾衛校尉)를 지낸 곽자의(郭子儀)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곽두응(郭斗應), 할아버지는 곽중조(郭重祖), 아버지는 곽원택(郭元澤),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로, 도필성(都必成)의 딸이다. 부인은 광주이씨(光州李氏)이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곽예로(郭禮魯), 곽의로(郭義魯)이며, 딸은 박리귀(朴履龜)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곽주남은 1755년(영조 31)에 대구 해안리(解顔里)[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에서 태어났다. 8세 때 부친 곽원택에게 글을 배웠는데, 『소학』에 대해 “사람다워지는 방법은 이 책뿐이다”라고 감탄한 뒤로 부지런히 익혔다. 이후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遠)의 문하에 나아가 『대학』을 부지런히 탐구하였다. 최흥원에게 선조인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의 문집 『괴헌집(槐軒集)』 교정을 부탁하였다. 최흥원은 「구용도(九容圖)」를 언급하면서 “이것이 학문하는 핵심이다. 자네 선조의 가르침이니 부지런히 익히도록 해라.”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부지런히 익혀 행동거지가 이전과 매우 달랐다. 곽주남은 안동[지금 경상북도 안동시]의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최흥원과 이광정의 문하에 출입하며 학문을 익혔다.
한편, 곽주남은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였다. 부친이 병에 걸리자 산삼을 구하기 위해 산에 들어갔다가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떤 노인이 산의 한구석을 가리키며 그쪽으로 가보라고 하였다. 노인이 시키는 대로 그쪽으로 가보니 과연 산삼 한 뿌리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산삼을 달여 부친에게 먹이자 부친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비바람에도 성묘를 그만두지 않을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삼년상을 지냈다. 만년에 작은 집을 짓고 ‘겸재(謙齋)’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이는 『주역』 「겸괘(謙卦)」초육(初六) 상(象)의 “겸손한 군자는 몸을 낮추어 자신의 덕을 기른다.[겸겸군자(謙謙君子) 비이자목야(卑以自牧也)]”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 1802년(순조 2)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48세였다.
[묘소]
곽주남의 묘소는 대구 거동(車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