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2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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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扶植農園[東區] |
영어공식명칭 | Joseonbusic Organiz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동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설립 시기/일시 | 1910년 11월 - 조선부식농원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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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조선부식농원 -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 |
성격 | 단체 |
설립자 | 가지마[加島敏郞] |
[정의]
1910년 11월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에 설립된 농원.
[개설]
1910년 11월 30일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당시 달성군 해안면 검사동]에 일본 오사카[大阪] 범애부식회(汎愛扶植會)의 창설자인 가지마[加島敏郞]가 주도하여 조선부식농원을 설립한 이래 1914년 6월 10일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았다. 조선부식농원은 이사 1명, 평의원 10명, 고문 2명 등을 두고, 구제·농업·인보·자영·식림 등의 5부를 설치하여 사업을 펼치고자 하였다. 재단법인 조선부식농원의 사업 유지비는 농장 수입 지대와 일반 기부금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총독부와 도지방비 보조금 등을 지원받아 운영되었다. 1923년 이래 일본의 건국기념일인 기원절에 일본 정부로부터 사회사업 장려금을 받았다. 그 뒤에도 일본 정부로부터 사회사업공로자로 선정되어 하사금과 은배 등을 수여했다. 또 재단법인 경복회로부터 1925년과 1926년에 걸쳐 2년 동안 매년 1천원의 농원 조성금을 지원받았고, 1929년 8월에는 장려금 명목으로 종신 연금 3백 원을 지원받았다. 조선부식농원의 농장은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방촌동·입석동에 걸쳐 있었다. 농장 한가운데 경주가도가 지나가고 있었다. 1920년 조선인 청소년을 수용하였다.
[설립 목적]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후원을 받아 설립된 조선부식농원은 “[일본=편집자] 국민교육을 받은 청년 남녀와 조선인 고아·빈아를 수용하여 농업교육과 실무교육을 실행하고, 이를 통해 자립자활의 건실한 농민을 양성”한다는 것을 명목상 목적으로 내세웠다.
[변천]
1940년 조선부식농원은 농원 내에 야학부를 개설하였다. 그 목적은 생활 안정에 기여하고 풍속을 개선한다는 것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3년 조선부식농원은 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당시 달성군 해안면]의 청년들로 청년단을 조직하고, 청년단은 농원으로부터 전 1반보, 연 1반보를 무료로 대부받아 공동경작을 실행하였다. 또 조선부식농원은 일본 농업이민을 적극 수용하였다. 조선부식농원이 선호하는 일본 농업 이민은 20세 이상의 남녀 청년들, 기혼의 남성 청년 등이었다. 조선부식농원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일본 농업 이민을 받아들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계약을 통해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토지를 장기 상환 방식으로 토지를 대여받아 한 가정당 19,835㎡[2정보]의 토지를 대여했다. 부업으로 양계와 양잠을 장려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 대표적 일본인 거주지인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일대에서 일본 농업이민사업과 조선인 청년의 농업 자활을 목표로 펼쳐진 일본계 농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