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3010
한자 溫達
영어공식명칭 Onda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집필자 최상기

[정의]

경기도 구리 지역에 있는 아차산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6세기 후반 고구려의 장군.

[개설]

온달(溫達)[?-590]은 한강 유역 일대의 소유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신라의 분쟁이 격화되던 6세기 후반에 활동한 인물로서,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온달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고구려는 475년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蓋鹵王)을 생포해 처형한 사건이 상징하듯이, 5세기 후반 이후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내고 한강 유역 일대를 차지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544년 말 안원왕(安原王)의 사망 이후 지배 세력 사이에서 발생한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해 동맹을 맺은 백제와 신라의 공세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고, 결국 551년 한강 유역 일대를 상실하게 되었다. 게다가 고구려는 552년부터 중국의 북제(北齊)와 외교적·군사적 긴장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 종족인 돌궐과도 지속적으로 분쟁을 겪었으므로 한동안 남쪽의 한강 유역 회복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었다. 고구려는 우선 북제 및 돌궐과의 갈등 해소에 전력을 기울이기 위해 신라와 비밀 협약을 맺어 한강 유역을 포함한 남부 전선(戰線)을 안정시켰다고 추정되며, 재차 한강 유역 일대에 대한 공략을 시도한 것은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한 590년에 이르러서였다. 온달 또한 영양왕 대에 고구려의 장군으로서 신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가계]

온달의 가계에 대해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삼국사기』 온달 열전에서는 평강왕(平岡王)이라고 했지만 동일인이다]의 딸과 결혼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 수 없다.

[활동 사항]

온달은 얼굴이 못생겨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이 가난해 행색이 초라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바보 온달'이라고 불리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온달은 어린 시절 너무 자주 울어서 농담 삼아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한 아버지 평원왕의 말을 믿고 온달과의 결혼을 고집하다 왕궁에서 쫓겨난 평원왕의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가난에서 벗어나고 성장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온달고구려에서 매년 3월 3일 왕과 여러 신하들 및 군대가 참여하는 사냥 및 제사에 참여해 무위를 과시함으로써 평원왕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요동(遼東) 지역을 침입한 북주(北周)의 군대를 격퇴할 때 큰 공을 세워 평원왕의 인정을 받고 정식으로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영양왕이 즉위한 후 온달은 신라가 빼앗은 한강 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자원해서 출전했으나 아단성(阿旦城)[지금의 아차산성] 아래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묘소]

온달이 사망한 후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온달이 왕의 사위로서 왕실의 일원이었고, 전장(戰場)을 방문한 온달의 부인이 온달의 관을 쓰다듬으며 돌아가자고 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지역에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한편 온달이 출전하면서 신라에게 빼앗긴 영역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한 맹세와 온달의 시신을 넣은 관이 부인의 애도 전까지 전장에서 움직이지 않았다는 일화에는 당시 한강 유역 회복에 대한 고구려인 전체의 염원이 반영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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