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억령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2061
한자 吳億齡
영어공식명칭 Oh Eokryeong
이칭/별칭 대년(大年),만취(晩翠)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미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2년연표보기 - 오억령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70년 - 오억령, 사마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83년 - 오억령, 홍문관 전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91년 - 오억령, 선위사로 현소(玄蘇) 접대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오억령, 고부 부사(告訃副使)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15년 - 오억령 대죄(待罪)
몰년 시기/일시 1618년연표보기 - 오억령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80년 - 오억령 문회 서원 제향
부임|활동지 황해도 관찰사 - 황해도 개성
부임|활동지 개성부 유수 - 황해도 개성
유배|이배지 강화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도
묘소|단소 오억령 묘 - 황해도 배천군
묘소|단소 오억령 단(壇)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문회 서원 - 황해도 배천군
성격 조선 후기의 문신
성별
본관 동복(同福)
대표 관직 성균관 사성|우부승지|대사성|이조 참판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단(壇)이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오억령의 본관은 동복(同福)이다. 아버지는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 오세현(吳世賢)이고,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참봉 성근(成近)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상서원 직장(常瑞院直長) 오극권(吳克權)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오원몽(吳元蒙)이다.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좌참찬(左參贊) 정효공(貞孝公) 홍담(洪曇)의 딸이다. 동생은 이조 참판 오백령(吳百齡)이다. 첫째 아들은 오익(吳翊), 둘째 아들은 오정(吳靖), 셋째 아들은 오전(吳竱)이다.

[활동 사항]

오억령(吳億齡)[1552~1618]은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2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으로 뽑혔다가 예문관 검열·호조 좌랑·이조 좌랑을 지냈다. 1583년 사가 독서(賜暇讀書)하고, 이조 정랑과 경상도 안무사를 거쳐 사간원 집의와 홍문관 전한을 역임하였다. 이때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가 오자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현소를 접대하였다. 모두들 보고하기를 머뭇거리는데도 불구하고 왜병이 대거 침입해 오리라고 선조에게 보고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전직(轉職)되었다. 그 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성균관 사성(成均館 司成)거쳐 1591년 진주사(進奏使)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1592년 귀국 도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개성에서 선조를 호종하였다. 이후 이조 참의, 우부승지, 대사성, 병조·공조·이조의 참의, 명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의 부접반사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대사헌이 되었고, 1598년 홍문관 부제학·대사간이 되었으며, 1599년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한 뒤 1601년 부제학으로 청백리에 뽑혔다.1604년 이조 참판 겸 홍문관 제학, 1607년 예조 참판을 지냈고, 이듬해 선조가 죽자 고부 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갔으나 소임을 다하지 못해 귀국 후 한때 파직되었다. 그 뒤 병조 참판·한성부 판윤·형조 판서·개성 유수 등을 지냈다. 1615년(광해군 7)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폐하자는데 반대하자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 앞서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소임을 다하지 못한 일을 다시 거론하며 오억령을 탄핵하니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멀리 귀양을 보내자는 논의가 일자 4년간 강화에서 대죄(待罪)[죄인이 처벌을 기다림]하다가 1618년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오억령은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예서·전서에 능했다. 저서로는 『만취 문집(晩翠文集)』이 있다.

[묘소]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오억령의 단(壇)이 있다. 원주(原州) 모산(某山)에 장사지냈으나 황해도 배천(白川) 선영으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오억령은 1597년 가선 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1680년 황해도 배천의 문회 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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