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언백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2052
한자 高彦伯
영어공식명칭 Go Eonbaek
이칭/별칭 국필(國弼), 해장(海藏)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미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미상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고언백, 양주 목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93년 - 고언백, 경상 좌도 병마절도사 부임
몰년 시기/일시 1608년연표보기 - 고언백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4년 - 고언백 선무공신에 봉해짐
부임|활동지 교동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리
부임|활동지 양주 - 경기도 양주시와 경기도 구리시 일부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제주
대표 관직 양주 목사|경기 방어사

[정의]

조선 후기에 현재 구리 지역이 속했던 양주에서 양주 목사를 역임한 무신.

[개설]

고언백(高彦伯)[?~1608]은 강화도 교동에서 세거한 집안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어 여러 능침(陵寢)을 지킨 무신으로 알려져 있다.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국필(國弼), 호는 해장(海藏)이다. 고언백의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활동 사항]

고언백은 강화 교동사람으로 향리(鄕吏)로 무과에 올랐고, 궁마를 잘 다루고 적을 만나면 몸을 돌보지 않고 싸웠으며, 특히 지형지물을 이용한 복병전(伏兵戰)에 능하였다. 임진왜란 때 많은 무공(武功)을 세웠는데 특히 검암산[구릉산] 서쪽에 두 개의 보루(堡壘)를 쌓고 전투하면서 왕릉(王陵)을 지키는 큰 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월 양주에서 군사를 모아 적군을 칠 것을 자청하였다. 선조가 이전의 전공을 인정하여 특별히 당상관으로 올려 양주 목사에 임명하여 능침을 보호하라고 명하였다. 고언백은 장사(壯士)를 모집하여 산꼭대기의 험한 곳에 모여 굳게 지키면서 적을 피하고 기회를 엿보아 기습적으로 적군을 공격하였으며, 항상 여러 능(陵)에 군사를 잠복시켜 왜적을 죽이고 능침을 지켰다. 8월 왜적 600여 명이 토원(兎院)[경기도 퇴계원] 지역의 가옥을 불태우자 그가 진격하여 적 62명의 수급을 거두었고, 12월 태릉(泰陵)과 강릉(康陵)에서 왜적 24명을 죽이고 왕릉을 지켰으며, 그 공으로 12월 가의대부(嘉義大夫)가 가자(加資)되고 양주 목사 겸 경기 방어사로 임명되었다. 1593년(선조 26) 1월 창릉(昌陵)[예종 부부 능] 근처에서 매복하였다가 왜적과 싸웠고, 6월 양주 지방에서 왜적을 차단 살육하여 42과를 참획하였으며, 고양 지방 여석령(礪石嶺)에 복병을 배치하여 왜적을 살육하여 87과의 수급을 참획하였다.

1593년 명나라 군사를 도와 서울 탈환에 공을 세우고 경상 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1596년(선조 29) 9월까지 근무하였다. 정유재란이 수습되고 나서 1604년(선조 37) 6월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 광해군이 왕위에 올라 임해군을 제거할 때, 체포되어 추국(推鞫)중 장형(杖刑)으로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고언백이 임진왜란 때 이천(利川) 싸움에서 왜병을 물리친 내용을 기록한 『해장 실기(海藏實記)』가 있다. 현재 육군 사관학교 육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고언백은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제흥군(濟興君)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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