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2036
한자 劉相奎
영어공식명칭 Yu Sanggyu
이칭/별칭 태허(太虛)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시대 근대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 11월 10일연표보기 - 유상규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6년 3월 - 유상규, 경신 중학교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16년 4월 - 유상규, 경성 의학 전문 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7년 - 유상규, 경성 의학 전문 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 - 유상규, 임시 정부 조사원 평북 강계 지역 책임자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유상규, 안창호(安昌浩) 비서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유상규, 경성 의학 전문 학교 부속 병원 외과 의사로 부임
몰년 시기/일시 1936년 7월 18일연표보기 - 유상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유상규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동부리 - 평안북도 강계군 동부리
거주|이주지 상해 - 중국 상해
거주|이주지 서울 - 서울특별시
학교|수학지 경성 의학 전문 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활동지 상하이 - 중국 상하이
활동지 서울 - 서울특별시
묘소 망우리 공원묘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안창호 비서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의사.

[개설]

유상규(劉相奎)[1897~1936]는 상해 임시 정부에서 도산 안창호의 비서로 일했다. 도산의 정신적 아들이었으며, 경성 의학 전문학교 부속 병원 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가계]

유상규의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태허(太虛)이다. 할아버지는 평북 강계(江界)의 이름난 한의사로 상인 조직인 상무회(商務會)의 회장을 지낸 유신진(劉信鎭)이고, 아버지는 유영성(劉泳星)이며, 어머니는 청주 이씨(淸州李氏)이다. 삼 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유상우(劉相禹)는 약종상을 하면서 임시 정부 연통제의 강계군 참사와 교통국 조사원을 지냈으며, 동생 유상하(劉相夏)는 경성 공업 전문학교 건축과를 나와 조선 건축 기술단 상무를 역임하였다. 이복 동생 유상익(劉相翊)도 약종상을 했다. 1927년 5월 5일 강계 유지로 명신 학교를 세운 이학면(李學勉)의 둘째 딸 이애신(李愛信)과 혼인했다.

[활동 사항]

유상규는 1916년 3월 경신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에 경성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3·1 독립 만세 운동 후 학교를 중단하고, 1919년 11월 중국 상하이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국내에 있는 유력 재산가, 학교 및 종교계 등을 조사하여 독립운동의 자료로 삼기 위해 조직한 임시 정부 조사원의 평북 강계 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2월에는 상해 임시 정부 요인이던 안창호(安昌浩)의 비서로 활약하였고, 그해 2월 22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서 조직된 흥사단(興士團) 원동 지부(遠東支部)에 가입하였으며, 유기준(劉基俊)을 흥사단에 가입시키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인재가 필요한 민족이니 고국에 돌아가 학업을 마치라."는 안창호의 권고로 1924년 귀국하여 이듬해 복학하였고, 1927년 졸업한 후 경성 의학 전문학교 부속 병원 외과 의사 및 학교의 강사로 박사 학위를 준비하였다. 한편, 동아 일보사 주최 강연회에 꾸준히 연사로 참석해 조선 민중의 의학적 계몽 활동을 벌였으며, 1930년에는 조선 의사 협회 창설을 주도하였다. 또한 동우회 잡지 『동광(東光)』은 물론, 『신동아』 등에 ‘태허(太虛)’라는 필명으로 많은 글을 실었다. 유상규는 1925년 12월부터 1931년까지 수양 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31년 하계 수양 대회를 개최할 때 김윤경(金允經)·김선량(金善亮) 등과 함께 동우회 강령의 선전 방안과 장래를 위하여 청년들로 구성된 청년 개척군(靑年開拓軍)의 조직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유상규는 의학으로 민족의 건강을 위한 공중 위생 계몽에 나섰다. 1936년 환자를 치료하던 중 단독(丹毒)에 감염되어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지상에 발표된 유상규의 글과 후손이 보관 중이던 미발표 원고 일부를 묶은 『애국지사 태허 유상규』가 2007년 출간되었다. 1925년 5월 『동광』 창간호부터 1926년 12월 8호에 걸쳐 연재한 「방랑의 일편」은 ‘특이한 결심을 하고 상해를 떠나 나가사키, 오사카로 노동 생활을 체험하던 작자의 회상기’라는 글이다. 이 연재물은 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며 겪은 일을 적은 수기 형식의 글로, 당시 일본에 건너간 조선 노동자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피로 그린 수기 젊은 의사와 삼투사」, 「의사 평판기」는 당시 의학계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묘소]

유상규의 묘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지에 있다. 묘 앞의 연보비에는 춘원 이광수가 쓴 『도산 안창호』에 나온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였다. 유상규는 상해에서 도산을 위해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 그는 귀국해 경성 의학 전문학교 강사로 외과에 있는 동안과 사퇴 후의 모든 시간을 남을 돕기에 바쳤다.”라는 문장을 새겨 놓았다.

[상훈과 추모]

유상규에게는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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