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로왕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2018
한자 蓋鹵王
영어공식명칭 Gaerowang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최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몰년 시기/일시 475년 - 개로왕 아차성 아래에서 고구려군에 의해 사망

[정의]

경기도 구리 지역의 아차성 아래에서 고구려군에 의해 사망한 백제의 왕.

[개설]

개로왕(蓋鹵王)은 백제의 21대 왕으로, 백제의 역사를 도성(都城)을 기준으로 삼아 한성기(漢城期)·웅진기(熊津期)·사비기(泗沘期)로 구분할 때 한성기 백제의 마지막 왕에 해당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 본기(百濟本紀)를 통해 개로왕의 생애와 통치를 알 수 있다. 『삼국사기』 도미 열전(都彌列傳)에도 개로왕 관련 일화가 실려 있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한강 하류 유역에 도읍을 정한 이래, 백제는 내부적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함과 동시에 외부적으로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와 상쟁을 거듭했다. 4세기 근초고왕(近肖古王) 시기에는 백제군이 북진해 평양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킨 사건이 상징하듯이 백제가 우위를 점했지만,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이후에는 백제의 아신왕(阿莘王)이 고구려에 영원한 복종을 맹세할 만큼 백제가 열세에 처하게 되었다. 개로왕고구려와의 긴장 관계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즉위해 안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밖으로는 고구려에 대항해 다방면으로 외교를 추진했지만 결국 장수왕(長壽王)의 명령을 받은 고구려군에 살해당했다. 이로써 한성기 백제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가계]

개로왕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유왕(毗有王)의 맏아들이다. 한편 『삼국사기』에서는 문주(文周)가 개로왕의 아들로 등장하지만, 다른 문헌 기록들을 감안하면 문주는 개로왕의 동생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울러 개로왕이 왜(倭)와의 우호를 위해 파견한 곤지(琨支)[『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등장하는 군군(軍君)과 동일인이다]도 개로왕의 동생이었다.

[활동 사항]

개로왕은 즉위 이후 국내외에 걸쳐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우선 왕족들을 조정에 대규모로 등용해 친위 세력으로 삼음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458년 개로왕이 중국 남조(南朝)의 송(宋)에 보낸 국서에서 작위를 내려줄 것을 요청한 11명의 인물 중 8명이 왕족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개로왕고구려에 대항해 주변 세력과의 제휴에 힘썼는데, 아버지 비유왕이 신라와 맺은 동맹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고 왜에 동생 곤지를 파견해 우호 관계를 강화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교류하던 중국 남조 외에 새롭게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대한 협공을 제안할 만큼 적극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기 위한 외교를 전개했다. 마지막으로 왕궁을 보수하고 선대 왕의 무덤을 새로 축조하며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는 등 왕실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토목 사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의 반작용으로 지배 세력 중 일부가 반발·이탈하고 국력을 지나치게 소모한 결과 고구려의 침공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다.

[묘소]

『삼국사기』에 따르면 개로왕은 475년 백제의 도성을 구성하는 북성(北城)[지금의 풍납토성]과 남성(南城)[지금의 몽촌토성]이 장수왕의 명령을 받은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함락당하는 와중에 도주했으나 결국 포로로 잡혀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끌려가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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