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릉 신도비(1890)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034
한자 綏陵神道碑(一八九零)
영어공식명칭 Memorial stone for Suereung(1890)
이칭/별칭 익종 수릉표(翼宗 綏陵表),수릉 익종 대왕 표석(綏陵 翼宗 大王 表石)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7-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최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90년연표보기 - 수릉 신도비(1890)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09년 8월 9일 - 조선 익종 출생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08년 12월 6일 - 익종의 비 신정 왕후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830년 5월 6일 - 조선 익종 사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890년 4월 17일 - 익종의 비 신정 왕후 사망
현 소재지 수릉 신도비(1890)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7-1지도보기
성격 유적/비
양식 방부개석(方趺蓋石)
관련 인물 익종|문조|효명 세자|신정 왕후|고종
재질 화강암[가첨석·농대석]|오석[비신]
크기(높이, 너비, 두께) 415.7㎝[높이]|190.0㎝[너비]|137.2㎝[두께]
소유자 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
관리자 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익종익종의 비 신정 왕후의 능인 수릉의 신도비.

[개설]

수릉 신도비(1890)는 익종(翼宗)신정 왕후(神貞王后)의 능인 수릉(綏陵)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익종은 순조(純祖)의 세자로 즉위 전에 사망했지만 아들이 헌종(憲宗)이 즉위하면서 왕으로 추존되었다. 1809년(순조 9) 출생해 1812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27년부터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작했으나 1830년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신정 왕후는 풍은 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로 본관은 풍양이다. 1808년(순조 8) 출생해 1819년(순조 19)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90년(고종 27) 사망했다.

[건립 경위]

수릉 신도비(1890)는 1890년에 세워졌다. 1830년에 사망한 익종[당시 시호는 효명 세자(孝明世子)]의 능이 두 차례 옮겨지는 과정에서 처음에 조성했던 표석도 개수(改修)되었고, 1890년에 사망한 신정 왕후수릉에 합봉(合封)하면서 기존 표석의 앞뒷면을 깨끗이 갈아서 새로 내용을 새긴 후 건립했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따르면 1890년 5월 1일 고종이 신정 왕후의 국상 및 수릉 합봉을 담당한 신하들과 논의하면서 헌종 시기에 마련한 표석을 깨끗이 다듬어 사용하고 본인이 직접 글을 쓰겠다고 지시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수릉 신도비(1890)는 익종신정 왕후의 봉분 남쪽 석축에서 남동쪽으로 약 60m 떨어진 비각 안에 있다.

[형태]

수릉 신도비(1890)는 네모반듯한 모양의 농대석(籠臺石)[비석의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운 후 그 위에 한옥의 지붕 모양을 본뜬 가첨석(加檐石)[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가첨석과 농대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신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었다. 전체 높이는 415.7㎝이며 가첨석·비신·농대석의 높이는 각각 91.2㎝·230.5㎝·94.0㎝이다. 전체 너비[농대석 너비도 동일]는 190.0㎝이며 가첨석·비신의 너비는 각각 188.4㎝·111.2㎝이다. 전체 두께[가첨석 두께도 동일]는 137.2㎝이며 비신·농대석의 두께는 각각 65.7㎝·136.0㎝이다. 가첨석은 팔작지붕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상세한 표현은 생략되었고 지붕 네 귀퉁이에서 추녀마루가 상당히 높게 솟아 있다. 농대석은 1단이며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금석문]

수릉 신도비(1890)의 비신 앞면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익종대왕수릉 신정왕후부우(朝鮮國 翼宗大王綏陵 神貞王后祔右)'라고 썼고, 익종신정 왕후의 생몰일·책봉일·장례일 등을 기록한 뒷면의 음기(陰記)는 고종이 직접 짓고 해서(楷書)로 썼다.

[현황]

수릉 신도비(1890)는 현재 사적 제193호로 지정된 동구릉 내에 있어서 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가 관리하고 있으므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아울러 신도비의 우측에는 1902년(고종 39)에 건립된 또 하나의 신도비가 있다.

[의의와 평가]

수릉 신도비(1890)는 1682년(숙종 8)에 건립된 영릉(寧陵)[효종(孝宗)과 효종의 비 인선 왕후(仁宣 王后)의 능] 표석 이후 점점 간략화되어 영조(英祖)·정조(正祖) 시기에 확립된 조선 왕실 신도비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또한 정조 이래 어필비(御筆碑)가 증가하는 경향 속에서 고종도 자신이 직접 비문을 짓고 쓴 점과, 19세기 조선 왕릉에 건립된 신도비 중 가장 크다는 점 등은 정조를 모범으로 삼아 정통성과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노력한 고종의 시도를 구체적으로 잘 보여 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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