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022
한자 惠陵
영어공식명칭 Hyereung
이칭/별칭 단의 왕후 혜릉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0-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718년연표보기 - 혜릉 조성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86년 - 단의 왕후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718년 - 단의 왕후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70년 5월연표보기 - 혜릉 사적 제193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6월 - 혜릉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현 소재지 동구릉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0-2지도보기
성격 유적/능묘
양식 단릉
관련 인물 단의 왕후
관리자 문화재청 조선 왕릉 동부 지구 관리소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제193호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단의 왕후의 능.

[개설]

혜릉(惠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단의 왕후(端懿王后)[1686~1718]의 능이다. 단의 왕후는 조선의 제20대 국왕 경종(景宗)의 비(妃)로, 본관은 청송이며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이다. 1696년(숙종 22)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경종과 가례를 올렸다. 단의 왕후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추어, 왕실의 어른을 모시고 병약한 경종을 돌보는 데에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1718년(숙종 44)에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왕후의 지위가 부여되었다.

[위치]

혜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서쪽 능선 숭릉(崇陵)경릉(景陵)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변천]

혜릉은 본래 세자빈의 묘에 해당하는 형식으로 조성되었는데, 단의 왕후가 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1720년에 경종이 즉위하여 왕후로 추존되자 묘 또한 능으로 승격되었고, 능호를 혜릉이라 하였다. 당시에는 왕후의 능에 걸맞은 석물을 추가하지 않다가 1722년에 이르러 도감을 설치하고 석물을 추가로 배치하였다. 경종과 경종의 계비(繼妃) 선의 왕후(宣懿王后)는 서울 성북구에 있는 의릉(懿陵)에 모셔져 있다.

[형태]

혜릉은 왕후의 능만 있는 단릉(單陵) 형태로 조성되었다.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석물의 크기가 작은 편이다. 혜릉의 능침 공간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상계는 봉분이 있는 가장 위의 구역이다. 병풍석(屛風石)[능, 묘의 봉분 둘레에 병풍같이 둘러막아 쌓은 돌] 없이 봉분 주위에 난간석(欄干石)[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기둥 모양의 돌]을 설치하고, 전면을 제외한 삼면을 곡장(曲墻)[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와 좌우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으로 둘렀다. 봉분 주위로는 석양과 석호를 설치하였고, 봉분 앞에 혼유석(魂遊石)[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무덤의 앞에 설치해 놓는 직사각형의 돌]이 있으며 양 옆으로 망주석(望柱石)[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이 한 쌍 세워져 있다. 한 단 아래의 중계에는 본래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이나 절 안에 세워 두는 석등]이 있어야 하나, 현재 장명등은 없고 흔적만 남아 있다. 조선 왕릉 중에서 장명등이 훼손된 유일한 사례이다.

중계의 양 옆으로는 문석인과 석마가 설치되어 있다. 가장 아래의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 등의 석물이 있다. 능침 공간 아래의 제향 공간에는 정자각이 자리 잡고 있다. 정자각 옆에는 비각이 있는데, 이 비각은 혜릉의 표석이 건립된 1747년(영조 23)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금석문]

혜릉의 비각에는 1747년(영조 23)에 세워진 표석이 남아 있다. 표석의 전면에는 전서체로 '조선국단의왕후혜릉(朝鮮國端懿王后惠陵)'이라 새겨져 있다.

[현황]

혜릉이 속한 구리 동구릉 전체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6월에는 조선 왕릉 전체가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혜릉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혜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중의 하나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실의 문화와 왕릉 연구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