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020
한자 元陵
영어공식명칭 Wonreung
이칭/별칭 영조 원릉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구리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8-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776년연표보기 - 원릉 내 영조의 능 조성
조성 시기/일시 1805년연표보기 - 원릉 내 정순 왕후의 능 조성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694년 - 영조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745년 - 정순 왕후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776년 - 영조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805년 - 정순 왕후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70년 5월연표보기 - 원릉 사적 제193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6월 - 원릉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현 소재지 동구릉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8-2지도보기
성격 유적/능묘
양식 쌍릉
관련 인물 영조|정순 왕후
관리자 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제193호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영조·정순 왕후의 능.

[개설]

원릉(元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영조(英祖)[1694~1776]와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 왕후(貞純王后)[1745~1805]의 능이다. 영조는 조선의 제21대 왕으로, 숙종(肅宗)의 둘째 아들이며 경종(景宗)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의 숙빈(淑嬪) 최씨이다. 영조는 1699년(숙종 25)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다. 경종이 아들도 없고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노론을 중심으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1721년(경종 1)에 연잉군은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 사이에서 불안한 지위에 있었으나 1724년 경종이 사망하자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를 표방하며 붕당의 폐해를 없애려 노력하였으나, 영조의 왕위 계승에 대한 부정과 탕평책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영조의 둘째 아들 사도 세자[장헌 세자] 또한 노론과 반목이 있어 여러 차례 노론의 비판에 직면하였고, 영조와의 사이 또한 좋지 않아 수시로 심한 꾸중을 들어야 했다. 결국 사도 세자는 정신 질환 증상을 보였고, 영조는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둬 비극적인 죽음을 맞도록 하였다. 붕당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때로는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지만, 영조는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여러 시책을 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정순 왕후의 본관은 경주이며, 오흥 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와 원주 원씨 사이의 장녀이다. 영조의 원비 정성 왕후(貞聖王后)가 사망한 후, 1759년(영조 35) 영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렸다. 아버지 김한구가 노론에 속해 있었으며, 스스로도 사도 세자의 죽음에 일조하는 등 노론의 입장을 옹호하는 편이었다고 평가받는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純祖)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하였다. 이때 정순 왕후는 시파 관료들을 대거 숙청하고 정조(正祖)가 세운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했으며, 천주교에 대한 금압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정조 대의 정치 문화를 부정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과단성 있는 정치 수행으로 질서를 바로잡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804년 수렴청정을 물리고 순조에게 직접 정사를 보도록 하였다. 1805년(순조 5)에 창덕궁 경복전에서 사망하였다.

[위치]

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의 서쪽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변천]

원릉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완성되었다. 원릉이 자리 잡은 곳은 본래 효종(孝宗)의 영릉(寧陵)이 있던 자리였다. 그러나 1673년(현종 14)에 석물에 틈이나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하여, 효종의 영릉을 여주에 있는 세종(世宗)의 영릉(英陵) 옆으로 옮겼다. 그러나 능을 옮기기 위해 봉분을 열었으나 별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고, 이후 영조원릉이 이곳에 조성되었던 것이다. 영조는 정성 왕후를 위해 홍릉(弘陵)을 조성하면서 자신도 이후 이곳에 쌍릉의 형태로 묻히고자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나, 1776년 영조가 사망하자 정조가 현재 원릉 자리에 모셨다. 1805년 정순 왕후가 사망한 후, 쌍릉 방식으로 영조의 옆에 묻히게 되어 현재 원릉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형태]

원릉은 국왕과 왕비의 봉분을 연이어 만든 쌍릉의 형태이다. 능침 공간은 크게 상계와 하계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이는 영조 대 이후 만들어진 조선 왕릉의 특징이다. 상계에는 봉분이 있는데, 봉분에는 병풍석(屛風石)[능, 묘의 봉분 둘레에 병풍같이 둘러막아 쌓은 돌] 없이 난간석(欄干石)[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기둥 모양의 돌]만 설치하였다. 전면을 제외한 삼면에 곡장(曲墻)[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와 좌우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을 둘렀으며, 봉분 주위로 석양과 석호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무덤의 앞에 설치해 놓는 직사각형의 돌]이 각각 놓여 있고 양 옆에 망주석(望柱石)[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한 쌍이 세워져 있다. 하계에는 장명등·무석인·문석인·석마 등의 석물이 있다. 능침 공간 아래에는 제향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정자각이 있는 곳이 바로 제향 공간이다. 정자각에서 능침 공간을 바라보면 오른쪽에 비각이 자리 잡고 있다.

[금석문]

원릉의 비각에는 총 세 기의 표석이 남아 있다. 가장 왼쪽의 표석이 영조가 사망한 1776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면에는 '조선국영종대왕원릉(朝鮮國英宗大王元陵)'이라 새겨져 있다. 이는 정조의 어필이다. 가장 오른쪽의 표석은 1805년 정순 왕후가 사망한 후 건립된 표석이다. 전면에 '조선국정순왕후부좌(朝鮮國貞純王后祔左)'라 새겨져 있다. 가운데의 표석이 가장 나중에 세워진 것으로, 1890년 고종(高宗)이 영조의 묘호를 '영종(英宗)'에서 '영조'로 바꾸면서 다시 세운 것이다. 전면에 '조선국영조대왕원릉(朝鮮國英宗大王元陵)'이라 새겼다.

[현황]

원릉이 속한 구리 동구릉 전체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6월에는 조선 왕릉 전체가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원릉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원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중 하나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실의 문화와 왕릉 연구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