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017
한자 穆陵
영어공식명칭 Mokreung
이칭/별칭 선조 목릉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600년연표보기 - 목릉 내 의인 왕후의 능 조성
조성 시기/일시 1608년연표보기 - 목릉 내 선조의 능 조성
조성 시기/일시 1632년연표보기 - 목릉 내 인목 왕후의 능 조성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52년 - 선조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55년 - 의인 왕후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87년 - 인목 왕후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00년 - 의인 왕후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08년 - 선조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632년 - 인목 왕후 사망
이장 시기/일시 1630년 - 목릉 천릉
문화재 지정 일시 1970년 5월연표보기 - 목릉 사적 제193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12월 - 목릉 정자각 보물 제1743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6월 - 목릉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현 소재지 동구릉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지도보기
성격 유적/능묘
양식 동원삼강릉
관련 인물 선조|의인 왕후|인목 왕후
관리자 문화재청 조선 왕릉 동부 지구 관리소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제193호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선조·의인 왕후·인목 왕후의 능.

[개설]

목릉(穆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조선의 국왕 선조(宣祖)[1552~1608]와 선조의 비(妃) 의인 왕후(懿仁王后)[1555~1600], 그리고 계비(繼妃) 인목 왕후(仁穆王后)[1587~1632]의 능이다. 선조는 조선의 제14대 국왕으로, 중종(中宗)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岧)이다. 어렸을 때부터 명종(明宗)의 총애를 받았으며, 명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사림을 우대하는 정치를 펴서 여러 이름난 인재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본의 침략 야욕을 오판하여 임진왜란의 참화를 겪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의인 왕후의 본관은 반남이며, 반성 부원군(潘城府院君) 박응순(朴應順)의 딸이다. 1569년(선조 2) 왕비에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며, 자식을 보지 못하였다. 1600년 정릉동 행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목 왕후의 본관은 연안이며,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의인 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1602년(선조 35)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 적자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당시 세자로 있었던 광해군(光海君)은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창 대군의 존재는 광해군에게는 정통성에 있어 위협이 되었다. 결국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영창 대군을 살해하고 인목 왕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으며, 이는 인조 반정의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다. 인조 반정 당시 인목 왕후는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의 즉위를 승인하기도 하였다.

[위치]

목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서 가장 깊숙한 곳, 태조(太祖) 건원릉(健元陵)의 동쪽 능선에 있다.

[변천]

목릉은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조성되었다. 가장 처음에 조성된 것은 의인 왕후의 능으로, 1600년 의인 왕후가 사망하자 현재 위치에 능을 조성하고 유릉(裕陵)이라 하였다. 1608년 선조가 사망하자 건원릉 서편 지금의 경릉(景陵)이 있는 자리에 능을 조성하고 목릉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1630년(인조 8) 당시 목릉이 물이 차고 풍수상 좋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으므로,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의인 왕후의 유릉과 합쳐 목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막상 능을 옮기기 위해 땅을 파보니 물이 없었으므로, 나중에 그 위치에 경릉이 들어서게 된다. 1632년 인목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의인 왕후의 능 옆에 인목 왕후의 능을 조성하여 현재에 이른다. 원래 목릉에는 표석이 없었으나 1747년(영조 23)에 표석을 세웠다.

[형태]

목릉은 정자각 하나를 두고 세 능이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동원삼강릉(同原三岡陵)의 형태이다. 조선 왕릉 가운데 동원 삼강릉의 형태로 조성된 것은 목릉이 유일하다. 정자각에서 보았을 때 가장 왼쪽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 왕후의 능이며, 가장 오른편에 조성된 것이 인목 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왕릉에는 삼면에 곡장(曲墻)[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와 좌우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을 두르고 봉분에 병풍석(屛風石)[능, 묘의 봉분 둘레에 병풍같이 둘러막아 쌓은 돌]을 둘렀으며, 봉분 주위로 난간석(欄干石)[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기둥 모양의 돌]이 조성되어 있다. 그 외 혼유석, 망주석 한 쌍, 석양과 석호 각 두 쌍, 무석인과 문석인 각 한 쌍 등이 설치된 전형적인 왕릉의 형태이다. 의인 왕후인목 왕후의 능에는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은 점이 차이가 있다. 의인 왕후가 사망했을 당시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참고할 만한 의궤가 모두 유실된 상태였기 때문에 묘향산의 의궤를 등사해 참고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세 능이 따로 조성되어 정자각을 함께 공유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목릉의 정자각은 선조의 능 앞에 지어져 한쪽으로 쏠려 있는 점이 특이하다. 왕과 왕비의 능이 하나의 정자각을 공유하는 동원 이강릉의 경우에는 정자각이 두 능의 정면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다. 인목 왕후의 사망 후 세 능이 모두 조성되었을 때 정자각의 위치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는데, 결국 선조의 능 앞에 정자각을 세우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정자각의 동쪽에는 비각이 있는데, 비각은 1747년 표석을 건립할 당시에 세운 것이다.

[금석문]

목릉의 비각에는 1747년(영조 23) 건립된 표석이 남아 있다. 영조 연간에는 신도비(神道碑)[죽은 사람의 업적을 칭송하여 새긴 비석]가 없는 조선의 각 왕릉에 표석을 세우는 사업이 진행되었다. 목릉의 표석은 휘릉·혜릉의 표석과 함께 영조 연간에 가장 먼저 건립된 것이다. 표석에는 '조선국선조대왕목릉의인왕후부중강인목왕후부좌강(朝鮮國宣祖大王穆陵懿仁王后祔中岡仁穆王后祔左岡)'이라 새겨져 있다.

[현황]

목릉이 속한 구리 동구릉 전체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6월에는 조선 왕릉 전체가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11년 12월에는 목릉 정자각이 보물 제174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목릉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목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중에서도 동원 삼강릉의 형태를 취한 유일한 능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실의 문화와 왕릉 연구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