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21016
한자 王陵
영어공식명칭 Royal Tomb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구리시
집필자 김미엽

[정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을 포함한 역대 왕들의 능[묘].

[개설]

한반도에는 일찍이 선사 시대부터 사람의 삶의 발자취인 생활 유적과 함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무덤이 생겼다. 이러한 관습은 부족 사회에서 계급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경건하고 엄숙한 축조 규칙을 갖게 되었고, 계급에 따른 다양한 규모의 무덤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시대에 따라 특정한 종교나 사상이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장묘 제도에 영향을 미쳤고, 지방적인 특색과 관습이 접목되어 나타났다. 이들 장묘 문화를 한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최고 권력자의 무덤인 왕릉이다. 왕릉은 봉분의 규모에서 왕족 또는 신하들의 묘와 구분되는 독자적 위상을 갖는다. 아울러 무덤 내부에 마련된 부장품 또는 봉분을 장식한 둘레돌[호석(護石)]과 능전에 배치된 석물에는 당대의 정치·경제·사상·문화의 총체적 양상이 반영되어 있다.

[삼국 시대의 왕릉]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한 고구려에서는 4세기 초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등장하였다. 고구려의 묘제는 국내성 시기에는 돌무지무덤[적석총(積石塚)]이었으나 평양 천도 이후에는 원형 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변화하였다. 평안남도 중화군에 있는 시조 동명왕릉(東明王陵), 중국 길림성 집안시의 호태왕릉(好太王陵)·장군총(將軍塚)·서대묘(西大墓)·천추총(千秋塚), 그리고 북한 황해도 안악군의 안악 3호분 등이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의 묘제도 한성 시기에는 적석총이었으나 웅진 및 사비 시기에는 원형 봉토분으로 변화하였다. 한성 시기에 해당되는 석촌동 3호분이 근초고왕(近肖古王)의 능으로 추정되고, 전라북도 익산의 대왕릉과 소왕릉이 무왕(武王)과 선화 공주(善花公主)의 능으로 추정되나 정확하지 않다. 웅진 시기에 해당하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10여 기 무덤 중 7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武零王陵)은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과 왕비의 무덤으로 삼국 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묘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여기서 108종 4,600여 종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한편, 사비 시기를 보여 주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중 2호분은 능산리 고분군에서 가장 먼저 축조된 것으로 성왕의 묘로 추정된다.

가야는 기원 1세기부터 562년까지 낙동강 하류 지역에 있었던 정치체로, 변한(弁韓)의 12국이 초기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가야의 왕릉은 고분군을 이루며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에 흩어져 있다. 그중 경상남도 김해에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릉(首露王陵)과 허왕후릉(許王后陵), 그리고 경남 산청에 금관가야 제10대 구형왕릉(仇衡王陵)이 있으며, 경상북도 고령의 지산동 고분군 가운데 47호분이 5세기 초의 인물로 추정되는 대가야 금림왕(錦林王)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국 시대의 왕릉]

발해의 경우 중국 지린성[吉林省] 둔화시[敦化市] 육정산 고분군(六頂山古墳群)에 있는 진릉(珍陵)에 대해 발해 제2대 왕인 무왕 대무예(大武藝), 제3대 왕인 문왕 대흠무(大欽茂), 정혜 공주의 생모인 문왕의 왕비 무덤이라는 주장이 있다.

신라의 경우 수도 경주에서 통일 이전 국가의 형성부터 935년 고려에 귀부할 때까지 거의 1,000년의 시간 동안 경주를 수도로 하였다. 그런데 경기도 연천군에 있는 경순왕릉(敬順王陵)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왕릉이 경주 지역에 조성되었다. 현재 경주 지역 무덤 가운데에는 왕[비]릉은 38기, 왕족 및 진골 귀족의 이름으로 전해오는 묘 4기,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 8기가 전한다. 그중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陵)은 능비(陵碑)가 남아 있어 묘주가 확실한 능이며, 흥덕왕릉(興德王陵)·문무왕릉(文武王陵)·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은 위치 비정과 시대적 형식이 맞아 학계에서 왕릉으로 인정하고 있다. 신라 왕릉은 풍수지리설에 입각하고 있지 않다. 즉 평지나 구릉에, 심지어는 문무왕릉처럼 수중(水中)에 위치하기도 한다. 또한 형식에 있어서도 봉토만 있고 둘레돌이 없는 형식, 봉토 밑에 자연석을 장치한 형식, 능 앞에 능비만 세운 것 등 여러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봉토 밑에 장판석(長板石)으로 둘레돌을 쌓고 십이지신상·석사자·문인석·석화표(石華表)·능비 등의 표물(表物)을 거의 완비한 형식은 성덕왕릉(聖德王陵)과 괘릉(掛陵)[원성왕릉으로 추정]·흥덕왕릉(興德王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시대의 왕릉]

고려 왕릉은 구조적으로 발해 및 통일 신라의 능제를 계승·발전시켰다. 봉분 주위에 곡장(曲墻)[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을 두르거나 십이지신상 둘레돌, 석수(石獸)[무덤을 지키게 할 목적으로 짐승의 형상을 새겨 만든 석물]와 석인상(石人像)의 배치 등이 이전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면, 능역의 구성 요소를 통합하고 규격화하여 고려의 능제를 완성하였다.

고려 제1대 태조 현릉부터 34대 공양왕 고릉까지 고려의 왕릉과 왕후릉은 총 60기이고, 개경을 중심으로 한 개풍 지역과 장단 지역, 그리고 강화도에 왕릉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개성의 송악산 북쪽과 만수산 남쪽 일대에 20여 기의 왕과 왕후들의 왕릉군이 조성되어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조성되어 있다. 현재 남한에 있는 고려 왕릉은 고종의 홍릉(洪陵), 희종 석릉(碩陵), 원덕 태후 곤릉(坤陵), 순경 태후 가릉(嘉陵), 능내리 석실분 등 총 5기가 인천광역시 강화도에 있고, 강원도 삼척과 경기도 파주에 공왕양의 고릉(高陵)이 있다.

[조선 시대의 왕릉]

조선 왕릉은 1408년부터 1966년까지 500여 년에 걸쳐 총 42기가 조성되었다. 그중 북한 개성에 태조의 원비를 모신 제릉(齊陵)과 제2대 정종과 정종 비 정안왕후를 모신 후릉(厚陵)이 있고, 남한에 40기가 있다. 또한 조선 왕릉은 도성에 가깝게 자리하여 관리의 편리성과 도성을 중심으로 한 왕권의 상징물로, 여주의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경기도 화성의 융릉(隆陵)과 건릉(健陵), 영월의 장릉(莊陵)을 제외하면 모두 도성 100리 안에 있다. 서울 중심권에는 태강릉[태릉(泰陵)과 강릉(康陵)], 의릉(懿陵), 헌인릉[헌릉(獻陵)과 인릉(仁陵)], 선정릉[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 있다. 서울에서 서쪽에는 파주 삼릉[공릉(恭陵), 순릉(純陵), 영릉(永陵)], 파주 장릉(長陵), 김포 장릉(章陵), 고양 서오릉[경릉(敬陵), 창릉(昌陵), 익릉(翼陵), 명릉(明陵), 홍릉(弘陵)]과 서삼릉[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 그리고 양주 온릉(溫陵)이 있다. 반면 서울에서 동북쪽으로는 남양주 광릉(光陵)·사릉(思陵)·홍유릉[홍릉(洪陵)과 유릉(裕陵)], 구리시의 동구릉[건원릉(健元陵), 현릉(顯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숭릉(崇陵), 혜릉(惠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이 있다. 조선 왕릉은 유교 문화의 맥락에서 자연 및 우주와의 통일이라는 독특하고 의미 있는 장례 전통에 입각해 있으며, 풍수지리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東九陵)을 포함한 조선 왕릉 40기가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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