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12090
한자 橋門洞
영어공식명칭 Gyomun-dong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진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교문동 경기도 구지면 이문동·백교리 전부, 인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교문리 설치
변천 시기/일시 1986년 - 교문동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교문리에서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으로 분리
변천 시기/일시 1995년 - 교문동 일부와 아천동 전 지역이 교문 1동으로 분리, 이외 지역을 교문 2동으로 분리
성격 법정동
면적 8.28㎢
가구수 8,138가구
인구[남/여] 17,819명[남자 9,901명|여자 8,691명]

[정의]

경기도 구리시에 속하는 법정동.

[명칭 유래]

교문동은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 때 백교리(白橋里)의 '교(橋)'와 이문동(里門洞)의 '문(門)'을 따서 교문리라 하였다가 1986년 교문동이 되었다. 이문동망우리 공동묘지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인데, 동네 어귀에 리(里)를 표시하는 문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문은 본래 도적을 막고 야간 통행을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세운 동네 어귀를 가로막는 큰 문을 뜻한다. 백교리아치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주민들은 '크다'라는 의미의 '한다리'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 때 '흰다리'로 발음된 것이 백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교문동은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 구역 개편 때 양주군 구지면 지역의 이문동과 백교리, 인장리 일부를 병합하여 교문리라 하였다가 1986년 구리시 승격에 따라 교문동이 되었다. 1995년 교문동이 행정동인 교문 1동교문 2동으로 분리되었다.

교문동의 자연 마을로는 한다리 마을·딸기원 마을·우미내 마을·아치울 마을·이문안 마을 등이 있다. 한다리 마을·아치울 마을교문동의 남서쪽 산자락에 있는데, 한강왕숙천의 범람을 피하여 지금 자리에 세워진 것이라 추측해 본다면 구리시의 자연 마을 중에서도 초기에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문안 마을아차산 자락에 있는 망우리 공동묘지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안골·박촌[아랫말]·샛다리·도래미·가능골·갈매지 등의 소규모 마을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현재의 교문 사거리 자리에는 덕고개라는 마을이 있었고, 교문 사거리에서 망우리로 넘어가는 고개 좌우에 딸기원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현재도 그 지명이 남아 있다.

현재 구리시청구리시 의회교문동에 있어, 구리시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자연환경]

구리시 교문동 서쪽에는 용마산이 아차산과 이어지는 능선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토평동, 북쪽으로는 인창동과 이어진다. 남북 방향으로 국도 43호선이 지나며, 국도 43호선을 기점으로 서쪽은 산지, 동쪽은 평지의 형태를 보인다. 백교 저수지, 이문안 저수지, 장자못 등의 저수지가 남아 있다. 이는 한강이 범람하면서 만들어진 범람원의 흔적이다. 교문동은 주로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근교 농업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는데, 점차 택지로 개발되어 현재는 산자락을 제외하고는 녹지가 거의 없다.

[현황]

교문1 동은 2017년 현재 면적 7.55㎢에 8,147가구, 1만 7,513명이 살고 있다. 교문 2동은 면적 1.15㎢에 8,072가구, 2만 4,224명이 살고 있다. 교문동의 서쪽은 산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쪽에 주택가와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구리시청구리시 의회, 구리 아트홀이 있으며, 교문동 북쪽의 국도 6호선이나 남쪽의 아천 나들목을 통하여 서울과의 교통이 원활한 것이 장점이다. 교문동은 구리시 중심 상권이라고 할 수 있는 돌다리 일대와 한다리 마을·딸기원 마을 같은 구리시 외곽 지역까지 아우르고 있어, 도시 경관과 자연 경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관을 포함하고 있다.

[참고문헌]
  • 『구리시지』(구리시, 1996)
  • 교문 1동 주민 센터(http://www.guri.go.kr/main/dong4)
  • 교문 2동 주민 센터(http://www.guri.go.kr/main/dong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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