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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문학의 향기, 박완서와 아치울 노란집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90023
영어공식명칭 Scent of literature of Guri, Park Wansuh and Achiul Noranjip
분야 구비 전승·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철수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치울 마을 노란집과 작가 박완서의 인연과 삶.

[프롤로그]

2011년 1월 21일 구리에는 눈이 내렸다. 아치울 마을 노란집에도 소복이 쌓였다. 그녀는 날이 바뀌는 새벽 2시에 잠에서 깼다. 서재로 간다. 잠시 창가에 앉아 날마다 바라보던 과수원의 배나무 가지가 마치 5월의 꽃처럼 피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다가 마당을 바라본다. 계절마다 호미를 들게 했던 꽃밭은 백지가 되었다. 검정 잉크로 글씨를 써 내려가고, 초록과 빨간 잉크로 이파리와 꽃잎들을 익숙하게 그려 간다. “애들아, 내 호미 맛을 기억해 줘야겠다.” 배꽃같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음를 짓는다. 그리고 평소처럼 오른손으로 입을 가린다. 마당 한 곳에 마음자리를 남긴다. 그날 아침, 좋아하던 초콜릿과 커피를 탁자 위에 올리지 못했다. 마당에 있는 사과나무가 흐느낀다. 사과나무 가지 위 눈송이가 글자가 되어 흐른다.

“죽기 전에 한번은 꼭 완벽하게 정직하게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건 농사밖에 없을 것 같다.”[산문집 『호미』]

“작가가 죽고 나면 작품만 남기면 된다. 작가는 영원한 현역이다. 내가 죽도록 현역 작가이고 싶은 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노년기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2006년 6월 구리 문인 협회 임원진 면담]

그리고 4시간 뒤 선생은 2011년 1월 22일 오전 6시 17분 이승의 인연을 뒤로하고, 노란집 마당의 꽃과 나무, 아차산의 새소리, 이웃사촌, 피붙이, 글쟁이들과 작별을 고했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쓰는 일이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自斃)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켰다.”[산문집 『노란집』]

박완서는 삶의 끈을 놓을 마지막 순간까지 후배들의 글을 살폈고, 4개월여의 투병을 가족 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박완서가 80세가 되던 해였다.

[인연(1), 가족]

작가 박완서는 1931년 경기도 개풍군[현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박적골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할아버지에게 유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할아버지와 오빠, 어머니가 대신했다. 1938년에 어머니를 따라 오빠가 공부하던 서울로 와 지냈다. 숙명 여자 고등학교를 거쳐 1950년에 서울 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1953년 휴전이 되자, 우리 나이 23살 되던 해에 호영진과 혼인을 하고, 10년 동안 내리 4녀 1남을 낳았다. 혼인 뒤 박완서의 가족사는 시어머니에게서 시작된다. 가족을 챙기는 일은 시어머니 몫이었고, 박완서는 습의(習儀)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외아들이었기에 아들에 대한 열망은 여염집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첫 딸 원숙을 낳고 이어 딸을 셋을 낳았지만, 10살까지 수수팥떡을 만들어 삼신할머니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 원태를 낳았다.

“[시어머니는] 사람을 유난히 아끼시는 분이셨다. 며느리가 임신을 한 것을 아시고 그때부터 조심조심 떠받들다가 해산을 하면 신생아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 경건해서 마치 종교 의식 같았다.”[산문집 『호미』]

한국 사회에서 대를 잇는 다는 것은 가족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선생은 비로소 안도했으리라. 시어머니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닭과 함께 끓인 미역국은 딸들의 젖맛을 돋우는 것보다 왕성했으리라. 그리고 눈물을 훔쳤으리라. 호씨 집안의 대를 이었으니, 그 도리의 크기는 재어 보았으리라.

[인연(2), 소설]

박완서는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그저 다섯 아이들의 분주함을 달래는 가정주부였다. 하지만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주체할 수는 없었다. 땀땀이 적어 놓은 메모지들이 넘친다. 남북으로 갈라진 황해도 고향의 풍경과 가족 그리고 전후의 삶을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기회가 왔다. 1970년 불혹의 나이 40세에 장편 소설에 도전을 했다. 첫 작품이자 불후의 명작인 『나목』이다. 『여성 동아』 현상 공모에 당선이 된 것이다. 소설 『나목』은 자전적 이야기이자 해방사를 비롯해 우리의 근현대사를 단숨에 읽게 하는 마력이 있다. 우물 속에 숨겨져 있던 박수근 화백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도 만들었다. 경험하지 않는 것은 쓰지 않는다는 문학적 철학을 던졌다. 또 스스로를 사람살이 휴머니즘(humanism)보다는 여성살이 페미니즘(feminism)이라 부르는 것도, 기억을 통한 현실에 대한 복수를 전재(全載)했다는 것도, 증언의 욕구가 많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박완서는 수증기를 내뿜고 달리는 철마가 되어 필부(匹婦)와 필부(匹夫)의 삶은 물론 해방사, 6·25 전쟁, 산업화, 인터넷 시대와 세대 간의 갈등을 소설과 에세이, 동화를 통해 속 시원히 풀어 주었다. 박완서는 역사의 고통을 고백으로 표현한 작가로 남아 있다. 소설 속 여성은 곧 자신이며, 우리다. 작가 박완서는 "내 소설은 경험을 파먹고 그리움을 파먹는 작업이었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인연(3), 종교]

박완서는 박씨 집안에서 호씨 집안으로 호적을 옮긴 지 26년 5개월 만에 천주교에 입교한다. 나이 50줄에 들어서이다. 입교의 계기는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잘못된 관행 때문이다. 팔순을 넘은 시어머니 장례를 치를 때, 시댁이 손이 귀한 집안이라 집안에 어른도 없었고, 장의사 측이 수의와 관 등의 문제로 티격태격, 상주를 불효자로 만드는 행태에 기분이 상했다.

“그분[시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나는 오랫동안 죄책감에 빠졌다. 내가 그전에 가 본 문상 중에서 나도 저런 대접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인상 깊은 장례식은 거의가 천주교 의식의 영결 미사였다. 내가 시부모님에게 해 드린 것 같은 대접을 받고 싶지 않아서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이렇게 불순하고 이기적인 며느리지만 그분이라면 저승에서도 ‘괜찮다. 괜찮아.’ 하고 고개를 끄떡일 것이다.”[산문집 『호미』]

선생은 천주교식 영결 미사를 통해 고인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절망보다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고, 인간의 슬픔이 얼마든지 정화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4~5년간 성당의 엄숙하고 화애로운 분위기에 젖었고, 마침내 영세를 받았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했던가. 일 년 뒤 부군도 아내의 뜻에 따라 입교했다. 미사가 끝나면 남편과 데이트도 즐겼다. 불혹에 소설을, 지천명에 종교를, 우연일까 필연일까?

[이별(1), 남편과 아들]

박완서의 맑은 웃음 속에는 슬픈 가족사가 숨겨져 있다. 온 나라가 올림픽에 들떠 있었던 1988년 5월에 남편을 여의였다. 행운은 뜨문뜨문 온다지만 불행은 줄지어 온다고 했다. 남편을 폐암으로 잃고,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삼 개월 만에 외아들 ‘원태’마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청천벽력이었다. 이별이 너무 야속했다. 누구나처럼 가족의 기대를 받았던 아들이었고, 대학 병원 마취과 레지던트였던, 25살 청년이었다.

“내 아들이 죽었는데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을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 것까지는 참아 주었지만, 88 올림픽이 그대로 열린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식이 죽었는데 고을마다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춤들을 추는 것은 어찌 참으랴. 내가 독재자라면 1988년 내내 아무도 웃지 못하게 하련만. 미친 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 본다.”[산문집 『한 마디만 하소서』]

문학과 생활에 있어서는 냉철하면서 올곧았지만 자식 앞에선 무너졌다. 단장(斷腸)의 슬픔이었다. 한동안 집필도 마다했다. 큰딸 원숙의 부산 집으로 가고, 이해인 수녀가 추천한 곳에서 피정도 했다. 피정처에서 ‘밥’이라는 화두로 시름을 풀고, 이기적인 생각을 접고 다시 펜을 잡았다. 박완서는 “아들의 기일이 돌아오면 신열을 앓는다.”고 늘 고백했다. 평범한 엄마다.

[만남, 노란집]

구리시 아천동 아치울 개울가에는 작가 박완서가 말년을 보낸 노란집이 있다. 2016년 1월 한 겨울에 찾았다. 대문 틈새로 마당을 바라본다. 선생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구석구석을 잠시 눈으로 만져 본다. 선생의 ‘호미맛’을 마당은 기억하는지 휑하지 않다. 선생이 ‘아치울’ 이름조차 예쁜 아차산 자락에 둥지를 튼 것은 평범한 기인, 재야 역사 학자 이이화의 영향이 컸다. 이이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한문 공부다. 처음엔 보문동에서 화곡동으로 두 시간 거리를 학구열로 찾았고, 나이 50줄을 바라보는 나이에 『소학(小學)』을 배웠다. 그러다 잠실 장미 아파트 같은 동 주민이 되었고, 이때 서로 사정으로 중단됐던 공부를 『맹자(孟子)』로 이었다. 이이화는 잠실 생활을 접고, 아치울에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선생은 잠실에서 가까운 거리라 아치울을 자주 찾았다.

“그때만 해도 구리는 시도 아니었고 면이었다. 아치울은 산골이었다. 그러나 버스에서 내려 국도로 걸어가는 길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는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소탈한 인격 못지않게 그 마을에 반해서 계속 한문 공부를 다녔다.”[산문집 『호미』] 30여 년 전 구리시 아치울 마을에 대한 소담한 인상이다. 박완서는 스승이 거처하는 작은 마을을 가슴에 담았고, 남편이 작고하기 전 지금의 노란집을 장만했다. 아치울박완서가 이삿짐을 풀 때가 칠순을 바라보는 68세였다.

“당시 매입한 집이 두 채였다. 한 채는 세를 주고 지금 서재가 있는 집은 어머니가 가끔 들러 글도 구상하는 별서(別墅)였다. 그러니까 집을 소유하고 남의 집처럼 다니셨고, 주말이면 문우들과 회합의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노란집을 마련한 지 10년쯤 지난 1998년에 아예 자리를 잡으셨다.”[큰딸 호원숙 채록]

박완서는 아파트에서 유토피아로 여겼던, 텃밭[채마밭]을 일구었다. 하지만 텃밭을 일구면서 유기농이 좋다지만 약을 치지 않으면 수확이 힘들었다. 게다가 매일 하는 육체 노동이 버거웠다. 하지만 가장 박완서를 괴롭힌 것은 수시로 드나들며 온갖 채소와 과일 이름을 외치는 행상이었다. 사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무공해 채소도 좋지만 농사 이외의 것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전문 농사꾼이 지은 걸 사 주는 것이 도리일 듯 싶었다.”[산문집 『호미』]

그래서 일 년 만에 채마밭은 꽃밭으로 바뀌었다. 봄에는 복수초·상사초 등 귀족스런 것들은 물론 부추·돌나물·쑥·씀바귀는 저녁 찬거리로 제격이다. 여름에는 채송화·봉숭아·한련초가 주인공이 되고, 가을에는 온갖 국화가 만발했다. 선생은 집 마당을 지극 정성으로 꾸몄다. 아파트에서는 누릴 수 없는 호사[?]를 선생은 즐겼다. 호미가 닳도록 꽃밭을 가꾸었다. 철에 따라 피는 꽃이 100종을 넘을 정도로 흙과 자연을 사랑했다. 꽃을 가꾸는 일을 농사에 비교할 정도로 행복한 공간이었다.

[동행(1), 아차산과 장자못]

아치울에 둥지를 튼 박완서는 마을 뒷산격인 아차산에 오르는 것을 즐겼다. 왁자지껄하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등산로보다는 스스로 개척한 산길로 오르는 것을 즐겼다. “여러 가지 불편함을 각오하면서까지 아파트를 벗어나 이 골짜기로 이사를 온 것은 단순히 산 때문이었다. 아차산은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도전할 정도로 높지도 험하지도 않다. 서울을 둘러싼 기품이 있고 웅장한 명산과 비교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는 첫눈에 들었으니 아마 이 산세가 내 나이에 버겁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산문집 『노란집』]

박완서아차산을 사랑하게 된 것은 첫정도 있었지만 백제와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역사 사실과 정상에 오르면 굽이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현실도 큰 몫을 했다. 박완서가 다닌 비밀의 산길을 알 수 없어 상상을 한다. 오를 때와 내려올 때 다르게 연출하는 풀꽃과 나무와 인사하고, 반갑게 지저귀는 새와 동무하고, 검은 눈을 껌벅이며 경계를 하는 다람쥐에게 말을 걸고, 잔걸음 소리에 놀란 꿩의 비상에 함께 놀라면서도 호젓이 걷는 뒷모습을 말이다. “매일매일 가슴을 울렁거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산이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런 복을 어찌 누릴까. 눈 온 산이 아니더라도 산은 평지와 다른 위험이 늘 도사리도 있다. 그래서 오늘도 ‘이 노구(老軀)를 받아주소서’, 산에 기도를 드리는 것도 울렁거림과 함께 차분한 경건을 맛볼 수 있는 기회다.”[산문집 『노란집』]

하루는 산길을 오르다 열쇠를 잃어버렸다. 아무리 문단속에 털털한 성격이지만 열쇠는 최소한의 방어가 아닌가. 다녀온 길을 발밑만 바라보고 다녔지만 꼭꼭 숨어서 드러나지 않는다. 딸들에게 맡긴 여벌로 안도했다. 며칠 뒤 다시 산에 오르자 산책길 나뭇가지에 열쇠가 매달려 있었다.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산길은 당신 혼자의 길이 아닌 여럿이 함께하는 오솔길임을 알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있다. 둘레가 4㎞쯤 되는, 기다랗게 활처럼 휜 자연 호수다. 지척에 그런 호수가 있었는데도 이리로 이사온 지 몇 년이 지나도록 모르고 지냈다. 거기를 산책로로 정하고 거의 매일 다닌 지는 몇 년이 안 된다. … 아침마다 산에 오르던 걸 걷기로 바꾼 것은 직립의 기쁨 때문일 것이다. 나이 때문이겠지만 오르막길에선 자주 숨을 몰아쉬게 되고 지팡이를 필요로하거나 엉금엉금 길 때도 있는 게 싫다.”[산문집 『호미』]

박완서아치울에 머물면서 기운이 남아 있을 때는 아차산을, 기운이 작아지자 장자 호수 공원 길을 걸었다. 산과 들에 박완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행(2), 구리 사람]

박완서와 구리시 문인들의 인연은 2003년 5월로 올라간다. 구리 문인 협회에서 '박완서 소설가 초청-문학의 향연'이라는 강좌를 열면서이다. 2007년 구리시는 책 읽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거실을 서재로 운동 본부’를 만들었는데, 중심에 박완서라는 문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07년 10월 20일 구리 실내 체육관에 선생을 보려고 1,000여 명의 시민이 운집했고, 조용조용히 전하는 문학과 삶에 대해, 문학인의 자세에 대해 경청을 했다.

“'박완서'라는 이름은 그 이름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주저함 없이 책을 읽게 만드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사소한 삶의 느낌과 문장이라도 박완서의 책 속에서는 살아 있음에 대한 샘물같은 감동과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들을 경험하게 된다. 박완서가 우리와 함께 아차산 한강을 바라보며 구리시에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구리시가 다른 시와는 다른 문화의 도시가 되는 것 같다. 이 가을에 그녀가 있어서 생동하는 가슴의 박동을 더 뜨겁게 느낀다.”[구리 도서관의 초대의 글]

그렇게 뜨겁게 달군 하루 행사를 통해 박완서 열풍은 계속 이어졌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박완서 소설 읽기 모임도 만들었다. 2009년 구리시에서 펼친 “한여름 밤의 북 축제”에 ‘박완서 작가가 들려주는 책과 독서에 관한 이야기’ 자리에서 또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자신의 인생을 통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였고, 그 내용을 필사한 것이 계기가 됐다. 도서관에 처음 가본 때가 초등학교 5학년이다. 책을 많이 읽은 것이 내 소설의 밑바탕이다.”[당시 강연 내용 중]

인창 도서관은 2009년 11월, 2층 종합 자료실에 '박완서 자료실'을 마련하였다. 선생의 문학적 업적과 작가 활동을 볼 수 있는 자료 207점을 전시하고 있다. 자료 중에는 첫작품 『나목』 초판본과 친필 원고 두 점도 있다. 하지만 전시 공간이 업적에 비해 초라해 구리시가 박완서 추모 2주기를 기해 토평동 소재 토평 도서관 인근에 박완서 문학관을 추진하고 있으나 예산 문제로 아직은 소원한 상황이다. 구리 도서관에서는 선생의 떠남이 아쉬워 해마다 추모 공연이 열린다. 1주기에는 “다시 만나는 그리움 - 박완서, 배우가 다시 읽다”라는 테마로 입체 낭독 공연을, 2주기에는 선생의 단편 「대범한 밥상」과 「촛불 밝힌 식탁」을, 3주기에는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이라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남편과의 투병 체험기를 적어 내려간 선생의 자전 소설로, 박완서 작가의 결혼식 영상과 낭독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깊은 감동을 주었다. 4주기에는 구리 아트홀이 개관돼 소설 「해산 바가지」를, 2016년 1월 27일 5주기를 맞아 단편 소설 「티타임의 모녀」를 낭독했다. 박완서 선생이 있었기에 구리시는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

[이별(2), 문학계 큰 별이 지다]

박완서는 2011년 1월 22일 오전 6시 17분 지병인 담낭암으로 향년 80세에 별세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의 삼성 서울 병원 장례식장 16호에 마련되었다. 생전에 ‘가난한 문인들에게 부의금을 받지 말라.’는 선생의 유언에 따라 유족들은 ‘부의금을 정중하게 사양을 한다.’는 안내문을 빈소에 걸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족적을 기려 금관 문화 훈장을 추서했다. 25일 오전 8시 30분 장례식장을 떠나 오전 9시 30분경 고인이 평소에 다니던 구리시 토평 성당에 도착했고, 10시에 발인 미사와 영결식을 했다. 11시 20분 경 23년 전 먼저 떠나보낸 남편과 아들이 묻힌 경기도 용인의 천주교 공원 묘지로 출발했다. 이 날 이별 미사에는 유인촌 전 문화부 장관을 비롯해 박범신·정과리·이경자·공지영 등 소설가와 이근배·이해인·정호승 등 시인, 구리 문인 협회, 구리 문화원 등 문학계 인사와 국회 의원, 구리 시장, 지방 의회 의원 등 정치 관계자와 신도 등 500여 명이 슬픔을 함께 했다.

[이별(3), 발인 미사]

성당 안에는 고인이 평소 좋아했다는 환한 웃음을 띤 영정 사진이 마지막 웃음를 보내고 있었다. 영하 10도 안팎의 강추위 속에서 치른 이날 장례 미사에는 큰 딸인 호원숙 작가 등 유가족과 고인에게 영세를 준 김자문 신부와 김성걸 신부, 김화태 신부, 조광호 신부가 고인과의 인연을 나누었다.

“선생은 시골길에서 만나는 아낙 같은 여인이었다. 한 떨기 수선화 같았다. 참으로 큰 분이셨음에도 요란하고 화려한 장례를 마다하시고, 신앙의 여정을 걸었던 성당에 소박한 영결 미사를 맡기셨다. 책 읽는 즐거움과 독서를 통해 삶을 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주신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우아한 죽음을 갈망했던 고인은 영원한 스승이었다. 선생의 영원한 축복을 기원한다.”[집례 김성걸 마리띠오 전 토평 성당 주임 신부의 회고사]

“선생님이 계셔서 그나마 따뜻했던 겨울이 오늘 이렇게 모질고 춥습니다. 이 시대의 어둠과 아픔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표현하셨으며 비상한 재능에도 전혀 거부감을 촉발하지 않는 인품에서 늘 참다운 재능의 깊이를 실감했습니다. 선생님은 삶이 뉴스였고, 글 쓰는 일과 사는 일이 모두의 전범(典範)이셨다. 사나운 시대에 풍진 시대에 험한 꼴을 많이 보셨지만 그 아픔과 쓰림이 국민 문학이 됐으니 결코 헛되지 않았다. 이제 하늘에서 부디 편히 쉬십시오."[유종호 예술원 회원의 조사]

"선생님께서는 영원히 불혹의 작가이십니다. 아직도 쓰셔야 할 소설이 흰 눈 속에 피어날 동백처럼 숨죽이고 있습니다. 못 가본 길이 그토록 아름다우십니까. 좀 늦게 가 보시면 아니 되옵니까. 고통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딘다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지론을 시에 접목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쓰시는 소설 열심히 읽겠습니다.”[정호승 시인의 추모사]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참으로 많이 사랑했고/ 많이 사랑받아 행복했노라고/ 겸손히 고백해 온/ 우리의 어머니를 받아주십시오.// 헤어짐의 슬픔을/ 그저 또 울고/ 또 우는 것으로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우리의 나약함을 굽어보시고,// 진실하고 따뜻하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지상의 소임을 다하고/ 눈오는 날/ 눈꽃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생을 마무리하신/ 우리의 어머니를/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더 행복하게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이해인 수녀의 기도문]

이해인 수녀는 유족에게 다가가 보듬었다. 가족은 오열을 했고, 장내는 숙연했다. 땅 위의 마지막 미사를 마쳤다. 고인의 자그마한 육신이 담긴 관이 영구차에 실릴 때 큰딸 원숙 씨와 문인들은 관의 끝자락을 잡았다. 아쉬움을 뒤로해야 한다. 11시 20분 영구차는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로 향했다.

"아아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구나. 천당까지는 안 바라지만 누구나 다 가는 저승문에 들어설 때도 생전에 아무것도 안 가진 자는 당당하게 고개 들고 들어가고 소유의 무게에 따라 꼬부랑 꼬부랑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버러지처럼 기어들어 가야 할 것 같다. U턴 지점은 이미 예전에 돌아 나의 시발점이자 소실점인 본향을 눈앞에 두고서야 겨우 그게 보이는 듯하다.”[산문집 『노란집』]

[에필로그]

박완서는 말년을 구리시 아치울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칠순을 넘겼고,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다. 별세 전 해에 등단 40주년을 맞았다. 80년의 삶에서 전반기 40년은 평범한 주부로 후반기 40년은 작가로 절반을 나누어 살았다. 여류 소설가의 친정어머니로 불린 박완서는 가족·마을·나라·사회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고발했으며, 작품 속에서 희망의 씨를 나누어주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친절한 복희씨』, 『그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가』와 소설집 『엄마의 말뚝이』, 『그 남자네 집』,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이 있다. 2009년에는 성장 동화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를 발표했다. 한국 문학 작가상, 이상 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이산 문학상, 중앙 문화 대상, 현대 문학상, 동인 문학상, 대산 문학상, 만해 문학상 등을 수상하는 등 박완서는 한국 문단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영원한 현역 작가다. 아치울 노란집에는 작가 박완서의 호미맛과 봄을 기다리는 화초들…. 작가 박완서의 발길이 닿은 아차산 오솔길과 장자못 흙길이 왠지 밟고 싶은 한겨울 새벽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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