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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2049
한자 淺川巧
영어공식명칭 Asakawa Dakumi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1년 1월 15일연표보기 - 아사카와 다쿠미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09년 3월 - 아사카와 다쿠미, 야마나시 현립 농림 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 거수 노수 명목지(朝鮮巨樹老樹名木誌) 저술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 민족 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 설립 운동 시작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아사카와 다쿠미, 잣나무 종자의 노천 매장 발아 촉진법 개발
활동 시기/일시 1928년 3월 -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의 소반 탈고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 고요적(古窯跡) 조사 경과 보고」 집필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2월 -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 공예회 개최
활동 시기/일시 1931년 - 아사카와 다쿠미, 『조선의 도자명 고 저술
몰년 시기/일시 1931년 4월2일연표보기 - 아사카와 다쿠미 사망
추모 시기/일시 매년 4월 2일 - 아사카와 다쿠미 서울과 일본의 유지(有志)들이 묘소 참배 행사 거행
출생지 키타코마군 - 일본 야마나시현 키타코마군
거주|이주지 서울 - 서울특별시
묘소 망우리 공원묘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지도보기
성격 인물[민속 학자]
성별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리 공원 묘지에 안장된 일본인 임업인, 민예 학자.

[개설]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는 일제 강점기 일본의 무분별한 개발과 수탈적 임업 때문에 헐벗고 균형 잃은 조선의 산을 안타까워 했고, 자연이 일러 준 방법만이 산과 숲을 키우는 길이라 여겼다. 한국의 산과 문화를 사랑했고, 죽은 뒤에는 유언에 따라 한국에 묻혔다. 그래서 아사카와의 이름 앞에는 항상 "죽어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가계]

아사카와 다쿠미의 할아버지는 오비덴에몬[小尾伝右衛門], 아버지는 나호사쿠[如作], 어머니는 게이[けい]이다.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은 노리타카[伯敎]이다.

[활동 사항]

1891년 1월 15일 야마나시[山梨]현 키타코마[北巨摩]군에서 출생했다. 일기나 동료들의 기록에 의하면 1890년 10월 22일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901년 아키타[秋田] 심상 고등 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6년 야마나시 현립 농림 학교에 진학하여 형과 함께 자취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8월 야마나시현에서 산림의 무차별한 남벌과 도벌에 의한 수해로 하천이 범람하고 232명이 사망했는데, 이런 참상을 목격하고 치수(治水)의 근원인 조림(造林)의 중요성을 통감하였다. 1909년 학교 졸업 후 아키다(秋田) 현 오오다테[大館] 영림서에서 국유림 벌채 작업에 5년간 종사하였다.

1913년 5월 조선으로 건너와 소학교 교원으로 일하고 있던 형 노리타카의 권유로 이듬해 아사카와 타쿠미도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 총독부 농공상부 산림과(山林課)에 취직하였다. 주 업무가 양묘(養苗)였으므로 종자를 채집하기 위해 조선 각지를 돌아다녔으며 많은 조선 사람과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또한 도자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진 형의 뜻에 공감하였기 때문에 전국에 산재한 도요지를 답사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데도 관심을 가졌다. 조선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도자기는 물론 조선의 민예품에도 큰 관심을 두고 몰두하였다. 1915년 형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를 만나 청화 백자를 선물하며 조선 예술에 대한 관심 사안을 논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민예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1916년 2월 미쓰에[みつえ]와 결혼하여 딸을 하나 두었으나 부인 미쓰에는 1921년 9월 폐렴에 걸려 사망하였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일본의 무분별한 개발과 수탈적 임업 때문에 헐벗고 균형 잃은 조선의 산을 안타까워했고, 1917년 동료와 함께 「조선 당송(唐松)의 양묘 성공 보고」라는 글을 발표하여 조림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19년 『조선 거수 노수 명목지(朝鮮巨樹老樹名木誌)』를 저술하였다.

1920년 야나기와 함께 조선 민족 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 설립 운동을 시작하여 조선의 민예를 이론적으로 전파하는 데 큰 족적을 남겼다. 1922년 조선 총독부가 조선 신궁을 세우고 광화문을 헐려고 하자 부당성을 주장하며 반대하였다. 그해 10월 이조 도자기 전람회를 주선하며 야나기[柳] 등과 분원(分院) 도요지를 조사하였다. 1923년 10월 사쿠[咲]와 재혼하여 이듬해 딸을 낳았으나 바로 죽었다.

1924년 4월 경복궁 집경당(緝敬堂)에 조선 민족 미술관(朝鮮民族美術館)을 설립하고, 잣나무 종자의 노천 매장 발아 촉진법을 개발하였다. 1925년 5월 「도요지 답사를 마치며」를 저술하였고, 1928년 3월 『조선의 소반』을 탈고하였다. 1930년 「조선 고요적(古窯跡) 조사 경과 보고」를 집필하고, 12월 조선 공예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 2월부터 3월까지 식목 행사 준비를 앞두고 조선 각지를 돌며 양묘에 관한 강연 때문에 과로한 나머지 급성 폐렴에 걸려 죽었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죽은 뒤에도 한동안 경성에서 살던 아내와 딸은 대한민국 광복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한국의 산과 문화를 사랑했던 아사카와 다쿠미는 유언대로 한국에 묻혔다. 그래서 아사카와 다쿠미의 이름 앞에는 "죽어서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는다. 또한 아사카와 다쿠미는 저서인 『조선의 소반』 서문에서 "피곤에 지쳐 있는 조선이여,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기보다 지니고 있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멀지 않아 자신에 찬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공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라는 충고를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조선의 소반(朝鮮の膳)』(1929), 『조선 도자명 고(朝鮮陶磁名考)』(1931)가 있다.

[묘소]

묘소는 본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이문동에 있었으나 1937년 도로 건설로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지로 이장되였으며, 해방 후 흥분한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964년 임업 시험장에서 복구하였다.

[상훈과 추모]

매년 4월 2일 서울과 일본의 유지(有志)들이 타쿠미의 묘 참배 행사를 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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