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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2028
한자 文一平
영어공식명칭 Mun Ilpyeong
이칭/별칭 호암(湖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8년 5월 15일연표보기 - 문일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5년 - 문일평 일본 유학.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와 세이소쿠정칙 학교를 거쳐 메이지 학원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08년~1910년 - 문일평, 평양 대성 학교, 의주 양실 학교, 서울 경신 학교 교사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문일평, 와세다 대학 정치부 수강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문일평,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규식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 동제사 가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문일평, 종로 보신각에서 조선 13도 대표자 명의로 「애원서(哀願書)」낭독 후 피감
활동 시기/일시 1927년 2월 - 문일평, 신간회 발기인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34년 5월 - 문일평, 진단 학회 발기인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39년 4월 3일연표보기 - 문일평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 - 문일평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서부동 -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수학|강학지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 - 일본 도쿄
수학|강학지 세이소쿠 학교 - 일본 도쿄
묘소|단소 망우리 공원묘지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지도보기
성격 학자|독립운동가
성별
본관 남평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묻힌 독립운동가, 학자.

[개설]

문일평(文一平)[1888~1939]은 국사학자로 활동하면서 민족 운동과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역사에서 ‘조선심(朝鮮心)’을 강조하였는데, ‘조선심’은 조선의 역사를 통하여 형성되고 조선 사상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된다고 하였다. 문일평의 역사 연구는 민족사의 반성이라는 측면과 민족혼의 발굴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민족사에 나타난 파쟁적인 면을 지적하기도 했으나, 이를 성리학의 명분론과 의리론에 결부시킴으로써 식민 사학자들의 당파성 문제와는 입장을 달리하였다. 또한, 당시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한국사의 장점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던 반면, 문일평은 민족사의 성찰과 반성에 역점을 두었다.

[가계]

문일평의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호암(湖嚴)이다. 아버지는 문천두(文天斗)이다.

[활동 사항]

문일평은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1905년 미국 선교사의 소개로 일본에 유학하여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 중학부와 세이소쿠 학교[正則學校]를 거쳐 그해 가을 메이지 학원[明治學院]에 입학하여 이광수(李光洙)와 같이 공부하였다. 1908년 메이지 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유학생들의 자강 운동 단체였던 태극 학회(太極學會)에서 평의원과 총무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학회 기관지인 「태극 학보(太極學報)」 편찬원으로도 참여하여 국민 주권론과 국가 독립론에 관한 계몽적인 논설들을 기고하였다.

1908년 귀국 후 약 3년 동안 평양 대성 학교(大成學校), 의주 양실 학교(養實學校), 서울 경신 학교(儆新學校) 등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최남선(崔南善)이 운영하던 광문회(光文會) 출입과 상동 청년회(尙洞靑年會) 토요 강습소 교사로 일하면서 민족 교육을 실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1910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민족 교육에 대한 열의를 포기하고 정치학을 공부하기 위해 1911년 재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2년 와세다[早稻田] 대학 예과를 수료한 뒤 정치학부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수강하였으며, 유학생 친목회 기관지인 「학계보(學界報)」의 편집을 담당하여 창간호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2년 국권 회복에 투신하기 위해 공부를 중단한 문일평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의 소개로 상하이 대공화보사(大共和報社)에서 일본 글 번역을 담당하면서 신규식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고, 함께 활동하였던 박은식·신규식·신채호 등과 함께 박달 학원(博達學院)의 교사로 활동했다. 동제사는 정치 사상으로 시민적 민족주의와 대동 사상(大同思想) 등을 지향하였고, 국혼(國塊)을 중시한 민족주의 역사관, 그리고 대종교(大琮敎)의 국교적(國敎的) 신앙을 공통 이념으로 하였는데, 아시아 각 민족, 특히 중국 국민당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18년 국내로 귀국해 1919년 3월 12일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조선 13도 대표자 명의로 「애원서(哀願書)」라는 제목의 글을 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시위 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그해 11월 16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동 학교·중앙 고보·송도 고보·배재 고보 등에서 교육 활동을 하였다. 역사를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 연구에 전념하게 된 문일평은 1923년 『동명』이라는 잡지에 「조선 과거의 혁명 운동」이라는 논설을 기고하는 등 역사관을 정립하였고, 1925년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역사 연구를 목적으로 또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일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일본의 식민 사관으로 인해 더는 일본에서 공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귀국하였다. 1927년 2월 『중외 일보(中外日報)』 기자 자격으로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간사를 맡아 통일 전선 활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그해 8월에는 물산 장려회(物産奬勵會)의 기관지인 『자활(自活)』의 주필로 선임되어 민족 자본 육성 활동과 그에 관한 계몽 의식을 고취시켰다. 1933년 『조선 일보』에 입사하여 사망할 때까지 편집 고문으로 활동했는데, 사론과 논설을 정력적으로 집필하면서 이때부터 역사 연구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1934년을 전후해 본격화한 '조선학 운동(朝鮮學運動)'에 참여하여 국학 진흥에도 힘을 쏟았으며, 1934년 5월 창립된 진단 학회(震檀學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문헌 고증 사학적 방법론의 도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1927년부터 1939년 사이 발표된 100여 편의 글 가운데 90% 이상이 이 시기에 집필된 대중적인 역사 관계 글들이었고, 많은 대중 강연을 통하여 한국사의 대중화와 민족 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학문과 저술]

문일평의 여러 글들은 사후 『호암 사화집」,『호암 전집』,『소년 역사 독본』 등으로 출간되었다.

[묘소]

문일평의 묘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리 추모 공원에 있다. 1997년에 세운 연보비에는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의 인도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칙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상훈과 추모]

문일평에게 1995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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