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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2012
한자 仁穆王后
영어공식명칭 Inmokwanghu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수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4년연표보기 - 인목왕후 출생
혼인 시기/일시 1602년 - 인목왕후, 왕비로 책봉, 태평관(太平館)에서 가례
몰년 시기/일시 1632년연표보기 - 인목왕후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3년 - 인목왕후, 정명공주(貞明公主) 출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4년 - 인목왕후, 소성정의(昭聖貞懿)의 존호를 받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06년 - 인목왕후, 영창대군(永昌大君) 출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24년 - 인목왕후, 명렬(明烈)의 존호를 받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32년 - 인목왕후, 광숙장정(光淑莊定)의 시호를 받음
묘소|단소 인목왕후 목릉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지도보기
성격 왕비
성별
본관 연안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경내 목릉에 묻힌 조선 후기의 왕비

[개설]

인목왕후(仁穆王后)[1584~1632]는 조선의 제14대 임금 선조의 계비(繼妃)이다. 선조에게는 두 명의 정비가 있었는데, 첫 번째가 의인왕후(懿仁王后)였고 두 번째가 인목왕후(仁穆王后)였다. 1600년(선조 33)에 의인왕후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1602년(선조 35)년에 인목왕후가 왕비가 되었다.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으면서 광해군(光海君)과 대립하였다.

[가계]

인목왕후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아버지는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고 어머니는 노기(魯垍)의 딸인 광산 노씨(光山盧氏)이다. 정명공주(貞明公主)와 영창대군을 낳았다.

[활동 사항]

인목왕후는 1584년(선조 17) 11월 14일 태어나 1602년(선조 35) 왕비에 책봉되었다. 1603년(선조 36) 명나라에서 인목왕후 김씨를 계비로 책봉하고 예물을 보내왔는데, 이 해에 첫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를 낳았다. 1604년(선조 36)에는 소성(昭聖)의 존호를 받았다.

1606년(선조 39) 3월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광해군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당시 세자는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공빈 김씨(恭嬪金氏)의 소생이며 동복형인 임해군(臨海君)도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왕위 계승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8세에 세자가 되어 분조(分朝)를 이끌며 고군분투하여 내외의 신망을 쌓았다. 명(明)에서 책명이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다는 점에서 다소 불안하기는 하였으나 선조의인왕후 사이에 왕자가 없었기 때문에 세자인 광해군의 왕위 계승은 당연시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의인왕후가 죽은 뒤 정비가 된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으며 왕위 계승 문제에 혼선이 발생하게 되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소북파(小北派)의 영수였던 유영경(柳永慶)이 원칙론에 입각하여 적통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다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정인홍이 선조의 건강을 이유로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권유하는 상소를 올리는 일이 발생하자 선조와 광해군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치를 때 공을 세운 세자를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영창대군이 아직 어리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처럼 왕위 계승 문제로 긴장감이 감도는 중에 1608년(선조 41) 선조가 갑자기 사망하여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영창대군의 존재는 광해군에게 불안 요소로 작용하였다. 결국 1613년(광해군 5)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 등이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무고를 하여 김제남은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9세의 나이로 죽었다. 1616년(광해군 8)에는 김제남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剖棺斬屍) 하는 등 인목왕후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을 겪게 되었다. 인목왕후는 1618년(광해군 10) 1월 28일 서궁(西宮)[지금의 덕수궁]으로 유폐되면서 이후 치욕과 회한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인목왕후가 절치부심하며 보낸 이 기간은 궁녀로 추정되는 작가가 쓴 『계축일기(癸丑日記)』를 통해 전해진다.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 서인들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일으켜 대북파가 숙청되면서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왕후는 대왕대비로 복호(復號)되었다. 인목왕후는 인조반정을 승인하는 교서를 내려 자신의 손으로 광해군을 폐위시켰다. 인목왕후는 1632년(인조 10) 6월 28일 49세로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보문경(普門經)』 친필 일부가 남아 있고, 인목왕후 필적 첩이 있을 정도로 글씨에 능했다고 한다.

[묘소]

인목왕후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목릉(穆陵)이다. 동구릉의 가장 안쪽에 있는데 왼쪽부터 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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