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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095
한자 南陽洪氏墓域
영어공식명칭 Namyang Hong Clan Myoyeok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명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28년 - 홍응 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57년 - 홍상 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39년 - 홍인수 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560년 - 홍사고 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492년 - 홍응 몰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513년 - 홍상 몰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539년 - 홍인수 몰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560년 - 홍사고 몰
개축 시기/일시 2012년 2월 23일 - 남양홍씨 묘역 전체 사초 공사
관련 사항 시기/일시 1492년 - 홍응 신도비 건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514년 - 홍상 신도비 건립
현 소재지 남양홍씨 묘역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치울지도보기
성격 사대부 문중 묘역
양식 문중 묘역에 단위 묘로 조성된 사성이 없고 석물을 갖춘 봉토분
관련 인물 홍응|홍상|홍백경|홍윤우|홍인수|홍덕수|홍사효|홍사고
소유자 남양홍씨 익산군파 휴휴당계 종중
관리자 남양홍씨 익산군파 휴휴당계 종중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에 있는 남양홍씨 묘역.

[개설]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차산에서 내려오는 마을의 북쪽과 동쪽 능선에 남양홍씨(南陽洪氏) 익산군파 휴휴당계 선영 묘역이 각각 조성되어 있다. 홍응(洪應)·홍상(洪常)·홍윤우(洪允祐)·홍인수(洪仁壽)·홍백경(洪伯慶)·홍사효(洪思斅)·홍사고(洪思古)·홍덕수(洪德壽) 등의 묘와 기타 3개 등 총 10개의 묘와 3개의 단이 있다.

[위치]

남양홍씨 묘역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아치울에 있다. 남양홍씨 묘역 입구에 '남양홍씨 익산군파 휴휴당계 선영'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변천]

남양홍씨 묘역은 2012년 2월 23일 대대적인 사초 공사를 하고 표지석을 건립했다.

[형태]

남양홍씨 묘역에는 총 10개의 묘와 3개의 단이 있다. 묘는 한곳에 모여 있지 않고 홍은과 홍상을 포함해 6개의 묘가 배치되어 있는 묘역을 중심으로 좌우 능선에 4개의 묘가 있고, 북쪽에 3개의 단이 있는데, 단은 모두 최근에 후손이 세운 것이다.

홍응 묘홍인수 묘 바로 아래 위치해 있으며, 정경부인 이씨의 묘는 바로 아래에 따로 있다. 묘에는 사성(莎城)[무덤 위에 반달모양으로 둘러막아 쌓은 둑]과 호석(護石)[무덤의 봉분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고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 하단 가장자리에 돌려 둔 보호석]은 없고, 월두형 묘갈(墓碣)[묘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을 둥글게 굴린 작은 비석]이 대좌 위에 놓여 있다. 혼유석(魂遊石)[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무덤의 앞에 설치해 놓는 직사각형의 돌]은 보이지 않으며, 상석 좌우로 장대석(長臺石)[섬돌 층계나 축대를 쌓는 데 쓰는, 길게 다듬어 만든 돌]으로 단을 쌓았다. 장대석 위에 고석(鼓石)[무덤 앞의 상석을 괴는 북 모양으로 생긴 둥근 돌] 없이 상석(床石)[무덤 앞에 제물을 차려 놓기 위하여 넓적한 돌로 만들어 놓은 상]이 얹혀 있다. 향로석(香爐石)[무덤 앞에 향로를 올려놓는 네모반듯한 돌]은 없으며 그 앞 묘단의 양 끝에 문인석(文人石)[문관의 형상으로 묘 앞에 세운 돌] 한 쌍이 있다. 묘 오른쪽 앞에는 신도비(神道碑)[죽은 사람의 업적을 칭송하여 새긴 비석]가 옆으로 세워져 있는데, 예조 참의 이숙함이 글을 짓고 동생인 홍흥(洪興)이 글을 쓰고 전액을 하여 1492년(성종 23)에 건립되었다. 신도비 비신에 새긴 글은 닳아서 해독할 수가 없다. 복련잎에 보주가 있는 모양의 개석[뚜껑돌]을 올렸으며, 비석을 받치고 있는 대좌에는 별다른 문양이 없다.

홍상 묘는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월두형 묘갈이 대좌 위에 있고 혼유석과 향로석이 없이 상석만 있다. 상석 좌우로 장대석으로 단을 쌓고 고석 대신 장대석 위에 상석을 얹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단을 달리하여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이나 절 안에 세워 두는 석등]이 있는데 하대석·간주석·상대석·화사석 등이 사각형으로 되어 있고, 각 면에 연화문(蓮花紋)과 안상문(眼象文)이 새겨져 있으며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屋蓋石)[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이 올려져 있다. 좀 더 앞으로 내려와서 묘 양옆으로 문인석 한 쌍이 있다. 묘역 오른쪽 측면으로 세워진 신도비는 용의 형상을 한 이수형의 개석을 올렸으며, 대좌에는 연화문과 안상문이 새겨져 있다. 신도비의 건립 연대는 1514년(중종 9)이다.

홍백경 묘는 아버지 당양군 홍상의 묘 바로 아래 있으며 전체 묘역의 맨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부인 진주 하씨와 합장묘이다. 사성과 호석은 없으며 월두형 묘갈이 대좌 위에 놓여 있고 상석은 단을 쌓은 장대석에 얹혀 있다. 그리고 단 아래 양옆 끝으로 문인석 한 쌍이 있다. 아버지 홍상 묘 사이에 높다란 단이 쌓여 있고 단 우측 아래에 홍상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홍윤우홍상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홍백경이다. 전체 묘역 중 맨 위에 위치해 있고, 부인 진천 송씨와 합장묘로 남향이다. 묘에 사성은 없고 묘역 뒤편으로 작은 돌로 담을 쌓고 있다. 봉분에 호석은 없다. 월두형의 묘갈이 대좌 위에 있고, 그 앞에는 혼유석과 상석이 있으며 상석 바로 밑에 장대석으로 단을 쌓고 있으며, 상석이 고석 대신에 장대석 위에 얹혀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향로석은 없으며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작고 아담한 사각형의 장명등이 있다. 장명등은 상대석과 하대석은 마모가 심하지만 안상문의 윤곽을 볼 수 있고, 화사석 위에는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묘역 두 번째 단 양끝으로는 문인석 한 쌍이 서 있는데 하나는 근엄한 표정, 또 다른 것은 미소를 짓는 모습의 이원화된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홍인수 묘는 부인 연안 김씨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윗대의 묘역과는 단을 쌓아 경계를 하고 있으며 월두형의 묘갈이 대좌 위에 있고, 혼유석과 상석이 있으며 상석은 2개의 고석 위에 얹혀 있고, 그 앞에 향로석이 나란히 놓여 있다. 그리고 앞 편 왼쪽에 장명등이 있고 문인석은 없다. 묘역의 석물은 혼유석을 제외하고 대부분 근래에 세운 것이며, 단을 표시한 장대석은 땅에 묻혀 보이지 않고 흔적만 있다

홍덕수 묘홍사고의 묘 바로 아래에 있고 남향으로 부인 동래 정씨와 합장 묘이다. 묘와 묘 사이는 작은 돌로 쌓은 높은 단이 있다. 사성은 흔적만 있고 봉분에는 호석이 둘러져 있다. 근래에 세운 것이다. 봉분 앞에는 월두형 묘갈이 대좌 위에 놓여 있고 연화문을 새긴 대좌는 3분의 1 정도 흙에 덮여 있다. 묘갈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봉분 앞에 단을 쌓은 흔적은 있으나 장대석은 상석을 놓은 것만 남아 있다. 묘 좌우로 문인석이 있다.

홍사효홍응, 홍상이 있는 묘군에서 오른편으로 조금 떨어진 능선에 있다. 한강이 보이는 남서향이다. 부인 광주 김씨와 쌍분으로 되어 있다. 사성은 흔적만 있고 봉분에는 호석이 둘러져 있다. 근래에 세운 것이다. 봉분 앞에는 월두형 묘갈이 대좌 위에 놓여 있고 대좌에는 안상문을 조각한 흔적이 있다. 묘갈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장대석으로 쌓은 단이 있다. 많은 부분이 흙에 묻혀 있다. 단 양 옆으로 문인석 1쌍이 있고 망주석은 없다. 호석을 제외한 석물은 분묘 당시의 것이다.

홍사고 묘는 부인 언동 권씨, 창녕 성씨, 전주 이씨와 합장묘로 남향이다. 사성은 없고 봉분은 호석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혼유석은 보이지 않는다. 푸른빛이 감도는 석질의 상석이 장대석 위에 있고, 상석 좌우에 납작한 돌로 30㎝ 높이의 단이 쌓여 있다. 묘비는 1987년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현황]

남양홍씨 묘역아차산 능선을 종렬로 길게 정리하여 장대석으로 단을 만들어 단위 묘의 경계를 짓는다. 6기의 묘가 들어서고 묘역이 차자 묘역 옆 능선으로 확장하여 4기의 묘를 앉혔다. 사초가 없는 헐벗은 산에 묘를 조성한 것 같은 형상이었으나 2012년 2월 23일 대대적인 사초 공사를 하였다.

[의의와 평가]

남양홍씨 묘역은 성종의 공신당에 배향된 휴휴당 홍응의 직계 가계 묘역이다. 홍상의 묘와 신도비는 520년 동안 묘역에서 보존되고 관리되어 왔다. 토양이 안 좋아 사초가 헐벗었지만 단촐한 석물과 호석 없는 봉토분은 가문의 명성과 다르게 소박하다. 왕이 직접 내린 홍상, 홍응 2기의 신도비와 장명등은 사료의 가치가 크다. 더 마모되기 전에 문화재 관리가 시급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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