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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문일평 묘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064
한자 忘憂獨立有功者墓域-文一平墓所
영어공식명칭 Munilpyeong Myo|Tomb of Munilpyeong
이칭/별칭 호암 문일평 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명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939년 4월 5일연표보기 -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문일평 묘소 조성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888년 5월 15일 - 문일평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939년 4월 3일 - 문일평 사망
개축 시기/일시 1997년 - 문일평 비석 개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5년 - 문일평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문화재 지정 일시 2017년 10월 23일연표보기 -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문일평 묘소 국가등록문화재 제691-2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문일평 묘소 국가등록문화재 재지정
현 소재지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문일평 묘소 -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84-2지도보기
성격
양식 사성과 호석이 있는 방형분
관련 인물 문일평
소유자 개인 소유
관리자 망우 공원묘지 관리 사무소
문화재 지정 번호 국가등록문화재

[정의]

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있는 독립운동가 문일평의 묘.

[개설]

문일평(文一平)[1888~1939]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다.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서부동 80번지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남평이다. 1905년 도일하여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 중학부와 세이소쿠 학교(正則學校)를 거쳐 일본 메이지 학원[明治學院]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3년간 학업을 마치고 1908년 귀국했다. 글과 언론을 통한 문화 활동으로 항일 투쟁을 하였다. 조선심(朝鮮心)과 조선 정신을 강조하며 민족주의 역사학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민족주의 사학이라는 대전제에서 신채호, 박은식 등에 의해 성립된 민족주의 사학을 발전시켜 1940년대 신민족주의 사학을 성립시키는 교량 역할을 담당하였다. 『호암 사화집』, 『호암 전집』, 『소년 역사 독본』 등의 저서가 있다. 1995년 독립운동가로서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03년에는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독립 기념관에 문일평의 어록비가 세워졌다. 2017년 10월 23일 국가등록문화재 제691-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망우 추모 공원 관리소에서 구리시 방향 왼쪽 순환로를 따라 오르면 동락천 약수터를 지나 왼쪽에 방정환 연보비가 있다. 1분쯤 더 가면 왼쪽에 정자가 있고 맞은편에 '위창 오세창, 호암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문일평 묘소 가는 길'이라고 찍힌 표지석이 있는 돌계단을 올라가면 왼쪽에 문일평의 묘가 있다

[변천]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문일평 묘소는 1939년 4월 5일 조성되어 비석의 비문을 위당 정인보가 짓고 김승렬이 글씨를 썼다. 원 비석은 그대로 두고 묘 오른쪽에 1997년 비석을 개축하여 『조선 일보』 논설 고문 이규태가 비문을 지었다.

[형태]

망우 독립유공자 묘역 - 문일평 묘소는 사성(莎城)[무덤 위에 반달 모양으로 둘러막아 쌓은 둑]이 있고 호석(護石)[무덤의 봉분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고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 하단 가장자리에 돌려 둔 보호석]으로 둘러싸인 방형분이다. 무덤 왼쪽에는 묘 조성 당시 세워진 비석이 있고 오른쪽에는 새로 세운 비석이 있다. 묘 앞에는 다리가 없는 상석이 있다[묘지 번호 203742].

[금석문]

문일평 묘비 전면에는 '호암 뮨일평선생지묘(湖巖 文一平先生之墓)'라고 쓰여 있다. 후면에는 '선생의 본관은 南平文氏[남평 문씨]. 족보에 적힌 이름은 明會[명회], 자는 一平[일평], 호는 호암인데 虎湖으로도 쓰고 湖岩으로도 썼다. 불우한 세대를 짧게 살면서 큰 뜻을 세웠기로 그 그늘을 오늘에 길게 드리우고 여기 고이 잠들고 계시다. 1888년 5월 15일 평안도 의주에서 한학자 천두[天斗] 공과 해주 이씨 사이에 태어나 조국이 광복되기 전인1939년 서울 내자동 백송이 자라던 담 너머 집에서 숨을 돌리니 나이 52세로 긴 뜻을 담기에는 너무 짧은 생애였다. (중략) 유명을 달리하신지 58년 만에 아들, 딸, 손자, 손녀들이 흠모의 정을 이 돌 그릇에 소복이 담아 받치오니 기리기리 명목의 거름이게 하옵소서.'라고 쓰여 있다.

문일평의 연도비 전면에는 '湖巖 문일평 선생(1888~1939 독립운동가, 민족 사학자)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 인도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직이다.-「애원서(哀願書)」 중에서'라고 쓰여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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