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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021
한자 顯陵
영어공식명칭 Hyeonreung
이칭/별칭 문종 현릉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452년연표보기 - 현릉 내 문종의 능 조성
조성 시기/일시 1513년연표보기 - 현릉 내 현덕 왕후의 능 조성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14년 - 문종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418년 - 현덕 왕후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441년 - 현덕 왕후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452년 - 문종 사망
이장 시기/일시 1513년 - 현덕 왕후 소릉을 현재 위치로 옮기고 현릉이라 개칭
문화재 지정 일시 1970년 5월연표보기 - 현릉 사적 제193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6월 - 현릉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현 소재지 동구릉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지도보기
성격 유적/능묘
양식 동원이강릉
관련 인물 문종|현덕 왕후
관리자 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문종·현덕 왕후의 능

[개설]

현릉(顯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조선의 국왕 문종(文宗)[1414~1452]과 문종의 비(妃) 현덕 왕후(顯德王后)[1418~1441]의 능이다. 문종은 조선의 제5대 국왕으로 세종(世宗)의 아들이며 단종(端宗)의 아버지이다. 1421년(세종 3)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김오문의 딸과 첫 번째 혼인을 하였으나 자질이 부족하다 하여 폐출되었고, 봉여의 딸과 두 번째 혼인을 하였으나 역시 폐출되었다. 이후 후궁으로 있던 현덕 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문종은 학문이 깊고 천문이나 역법 등에도 능통하여 세자 시절부터 아버지 세종이 여러 업적을 쌓는 데 큰 힘이 되었다. 1445년(세종 27)부터는 세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다. 1450년에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중 학문을 권장하였고 병제 개편에도 힘써 성과를 거두었으나, 몸이 허약하여 1452년에 세상을 떠났다.

현덕 왕후의 본관은 안동으로, 화산 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이다. 1431년(세종 13) 세자궁에 입궁하여 문종을 모시다가, 세자빈 봉씨가 폐출된 후 세자빈이 되었다. 1441년 단종을 출산하였으나 3일 후에 세상을 떠났고,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한 후 왕후로 추숭되었다. 현덕 왕후의 어머니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1457년(세조 3)에 현덕 왕후 또한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1513년(중종 8)에야 다시 왕후의 지위를 되찾았다.

[위치]

현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의 동쪽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변천]

현릉은 1452년 문종이 사망한 후, 문종을 위한 능으로 조성되었다. 본래 현릉의 위치는 세종의 영릉(英陵) 옆으로 정해졌으나, 작업 도중 물이 솟아나 능을 만들지 못하였다. 이에 태조(太祖)건원릉(健元陵) 옆 현재 위치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현덕 왕후문종보다 11년이나 앞서 세상을 떠났으나, 당시 현덕 왕후는 안산에 장사 지내어 소릉(昭陵)이라 칭하였다. 단종 복위 모의 사건으로 인해 1457년 현덕 왕후의 지위가 서인으로 강등되자, 소릉 또한 왕비의 능에서 서인의 무덤으로 격하되었으며 위치 또한 바닷가로 옮겨졌다. 1513년 현덕 왕후가 복권되면서 문종의 능 옆으로 옮겨 함께 현릉이라 불리게 되었다.

[형태]

현릉은 국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하고 가운데에 정자각을 둔 동원 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서쪽이 문종의 능이고 동쪽이 현덕 왕후의 능이다.

문종의 능침 공간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뉜다. 가장 위의 상계에는 봉분이 있고 봉분 주변에는 석양·석호 등의 석물이 둘러싸고 있다. 봉분에는 병풍석(屛風石)[능, 묘의 봉분 둘레에 병풍같이 둘러막아 쌓은 돌]을 두르고 다시 난간석欄干石)[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기둥 모양의 돌]을 설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무덤의 앞에 설치해 놓는 직사각형의 돌]이 있고 양 옆에 망주석(望柱石)[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이 설치되어 있다. 중계에는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이나 절 안에 세워 두는 석등]·문인석(文人石)[문관의 형상으로 능 앞에 세운 돌]·석마 등의 석물이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석마 등의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현덕 왕후의 능은 중종 대에 조성한 것이기 때문에 문종의 능과 거의 동일하지만 약간 다른 양식을 취하고 있다. 봉분 주위로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설치한 것이 문종의 능과는 다른 부분이다. 그 외 석물의 배치는 문종의 능과 같다.

두 능은 제향 공간을 서로 공유하는 형태로, 정자각이 중간 위치에 세워져 있다. 정자각 북동쪽에는 비각이 건립되어 있다. 세종의 영릉을 조성할 때까지는 왕릉에 신도비를 세운 것이 조선 왕릉의 특징이었으나, 제왕의 업적은 역사책에 실려 있으므로 별도로 기록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문종현릉 이후로는 별도의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비각 또한 건립되지 않았다. 영조 연간인 1775년(영조 51)에 경릉에 표석이 건립되었고, 이때 비각도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석문]

현릉에는 1775년에 완공된 표석이 남아 있다. 전면에는 전서로 '조선국문종대왕현릉현덕왕후부좌강(朝鮮國文宗大王顯陵顯德王后祔左岡)'이라 새겨져 있다.

[현황]

현릉이 속한 구리 동구릉 전체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6월에는 조선 왕릉 전체가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현릉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현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중 하나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실의 문화와 왕릉 연구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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