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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32015
한자 健元陵
영어공식명칭 Geonwonreung
이칭/별칭 태조 건원릉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 시기/일시 1408년연표보기 - 건원릉 조성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335년 - 태조 이성계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408년 - 태조 이성계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70년 5월 26일연표보기 - 건원릉 사적 제193호로 지정됨
문화재 지정 일시 2011년 12월 26일 - 건원릉 정자각 보물 제1741호로 지정됨
문화재 지정 일시 2013년 7월 16일 - 건원릉 신도비 보물 제1803호로 지정됨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6월 - 건원릉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됨
현 소재지 동구릉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지도보기
성격 유적/능묘
양식 단릉
관련 인물 태조
관리자 문화재청 조선 왕릉 동부 지구 관리소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태조의 능.

[개설]

건원릉(健元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조선 태조(太祖)[1335~1408]의 능이다. 태조는 조선을 개국한 왕으로 이름은 이성계(李成桂)이다. 이성계는 고려 말기 홍건적이나 왜구 등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잡았으며, 1392년 7월 조선 왕조를 세웠다. 이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 이후 왕위를 정종(定宗)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으며,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별전에서 사망했다.

[위치]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중앙의 깊숙한 곳에 있다. 주산을 검암산(儉巖山)[구릉산]으로 두고 그 아래 능선에 정북에서 동쪽으로 약간 기운 방향으로 조성되었다. 건원릉의 입지가 결정된 것은 태조가 사망한 1408년 6월이었다. 본래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 왕후(神德王后)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당시 덕수궁 뒤편 현재 정동의 영국 대사관 부근에 있었던 신덕 왕후의 정릉(貞陵)에 능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그러나 태종은 영의정 하륜(河崙) 등에게 명하여 원평, 봉성, 행주 등 다양한 후보지를 둘러보도록 한 끝에, 최종적으로 능의 위치를 양주 검암으로 확정하였다. 신덕 왕후의 정릉은 당시 도성 밖으로 옮겨져 현재 성북동에 있다.

[변천]

건원릉은 조선을 건국한 개국조의 왕릉이니만큼 조선에서도 특별하게 관리하였다. 왕릉 조성 후 태종은 재궁(齋宮)에 개경사(開慶寺)라는 이름을 내리고, 노비와 토지 및 수호군을 두도록 하여 관리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다. 건원릉은 이후 수차례의 보수를 거쳤다. 가장 처음으로 나타나는 보수에 관한 기록은 세종(世宗) 대이다. 세종은 산릉 수리도감을 설치해 건원릉과 신의 왕후의 제릉, 태종의 헌릉을 함께 수리하도록 하였다.

건원릉은 임진 왜란 당시에도 훼손되지 않을 정도로 신령함이 깃든 곳이라 하여, 별다른 일이 아니면 보수 작업을 하는 것도 신중하게 결정하였다. 1690년(숙종 16)에는 신도비(神道碑)[죽은 사람의 업적을 칭송하여 새긴 비석]를 보호하기 위해 비각(碑閣)을 세우도록 하였다. 건원릉의 정자각 또한 선조 대에 중수한 바 있으며, 영조 대에도 다시 중수도감을 설치하여 정자각을 수리했다.

[형태]

건원릉은 조선에서 처음으로 조성한 왕릉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말 왕릉의 양식을 따랐으나, 봉분 주위에 곡장(曲墻)[능, 원, 묘 따위의 무덤 뒤와 좌우에 둘러쌓은 나지막한 담]을 두르는 등 세부적인 석물 배치에서 고려 시대 왕릉과는 다른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건원릉은 왕비의 능과 합장하지 않고 태조를 위한 능만을 단릉 방식으로 조성하였다. 능의 가장 윗단인 상계를 보면 봉분이 있다. 봉분에는 억새풀을 덮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잔디를 덮은 조선 왕릉들과는 다른 점이다. 이에 관해 고향인 함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은 것이라는 일화가 전한다.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화강암으로 된 병풍석(屛風石) 12면을 두르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 등을 새겼다. 또한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欄干石)[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기둥 모양의 돌]이 놓여 있다. 봉분 주위로 각각 두 쌍의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번갈아 배치되어 있으며,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무덤의 앞에 설치해 놓는 직사각형의 돌]을 놓았고 좌우로 망주석(望柱石)[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을 배치하였다. 그 아랫단인 중계에는 중앙에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이나 절 안에 세워 두는 석등]이 있고, 좌우로 각각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있다. 하계에는 좌우로 석마 한 필씩이 딸린 무석인이 배치되었고, 중앙에는 정중석(正中石)이 있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다.

[금석문]

건원릉의 정자각 남쪽에는 숙종 대에 건립한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는 신도비와 묘표(墓表)[표석]가 한 기씩 세워져 있다. 왕릉의 능역에 신도비를 세운 것은 조선 초기 왕릉의 특징 중 하나이다. 고려의 왕릉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고, 문종 대 이후로는 제왕의 사적은 모두 역사책에 실려 있어 따로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왕릉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조 대 이후 신도비가 없는 왕릉에 묘표를 세우는 작업이 활발하게 벌어진 바 있다. 신도비는 능이 조성된 1409년에 세웠다. 중앙에 전서로 '태조건원릉비(太祖健元陵碑)'라 새겨져 있고, 비문에는 태조의 공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음기(陰記)에는 개국 공신 등 공신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권근(權近), 음기(陰記)는 변계량(卞季良)이 지었으며, 전액(篆額)은 정구(鄭矩)가 쓰고, 글씨는 성석린(成石璘)이 썼다.

묘표는 1900년에 세운 것이다. 전면과 음기 모두 고종(高宗)의 어필로 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전서로 '대한 고황제 건원릉(大韓 高皇帝 健元陵)'이라 적혀 있다. 대한 제국 선포 이후 1899년에 고종은 태조를 고황제로 추존하고 1년 뒤 묘표를 세웠는데, 이는 대한 제국의 독자성을 보여 주고자 하였던 고종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평가된다.

[현황]

건원릉이 속한 구리 동구릉 전체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6월에는 조선 왕릉 전체가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11년 12월에는 건원릉 정자각이 보물 제1741호로, 2013년 7월에는 건원릉 신도비가 보물 제1803호로 지정된 바 있다. 현재 건원릉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건원릉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중에서도 그 표본이 되는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실의 문화와 왕릉 연구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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