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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21020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공식명칭 the Korean War
이칭/별칭 한국 전쟁,6·25 동란,6·25 사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미엽

[정의]

1950년에 북한 인민군이 불법으로 남침하여 경기도 구리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치러진 전쟁.

[개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유엔군의 참전과 1951년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1953년 7월 정전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휴전하였지만, 남북한 모두에게 막대한 인적·물적 손실을 끼쳤으며, 아직도 전쟁 재발의 위험은 남아 있다. 한편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으로 승기를 잡은 연합군은 아차산 줄기를 따라 북진하여 망우리 고개를 장악하였으며, 구리 지역 탈환을 위해 밤새 치열한 교전을 벌여 북한군 5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전쟁 직전의 남북한 정세]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이후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을 기준으로 점령하였던 한반도는 모스크바 외상 회의와 미소 공동 위원회의 결렬을 거쳐 유엔에서 남북한이 동시 선거를 하도록 결의했다. 하지만 1948년 8월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9월 북한에서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선포됨으로써 분단은 공식화되었다. 1948년 남북한 각각의 정부가 수립된 상태에서 북한은 계획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1948년 10월 완전 무장한 4개 보병 사단과 제105 기갑 대대를 편성하였고, 1949년 3월 17일 소련과 군사 비밀 협정 체결, 3월 18일 중공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여 북한은 38도선에 10개 사단, 후방에 10만 명의 예비군을 갖추었다. 반면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은 제주 4·3 사태, 여수·순천 사건 및 대구 폭동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 사회 불안이 고조되었다. 이어 1949년 6월 남한에서 미군이 철수하였고,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는 애치슨(Acheson, D. G.) 성명이 발표되었다. 김일성은 이미 1949년 말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남한 침공 계획을 승인받은 상태였다.

[구리 지역에서의 6.25 전쟁]

철저한 군사적 준비를 마친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한을 전면 공격하였다.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국민들에게 북한군의 격퇴를 장담하는 방송을 하면서도 뒤로는 피난을 서둘렀다. 북한군은 전쟁 발발 두 달이 채 안된 8월 중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도 지역을 제외한 전국을 장악하였다. 북한은 점령 지역에서 과거 해체된 인민 위원회를 복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아직 실행하지 않았던 토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경기도 구리 지역 역시 이러한 북한의 점령 정책이 실시되어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젊은 사람들은 의용군으로 징집되었으며, 전쟁 중 파괴된 남양주와 양평을 이어주는 양수리 다리와 퇴계원 방면의 다리 복구 공사에 주민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과 유엔군의 추가 참전으로 전세는 변하였다. 미군과 한국군 등 연합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9월 20일 행주산성을 장악하고 25일에는 서울시 마포까지 진출하였다. 9월 26일 국군 제17연대의 2개 대대가 아차산 줄기를 따라 북진하여 용마봉을 점령하였으며, 망우리 고개를 장악하여 경춘 가도(京春街道)를 차단하였다. 특히 구리 지역 탈환을 위해 9월 26일 밤부터 27일 새벽까지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는데,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우세는 계속 이어져 38도선을 넘어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압록강에 이르렀다. 하지만 1950년 11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6·25전쟁은 대한민국·미국·유엔 그리고 북한과 중공군이 참전하는 국제전의 양상으로 변하였다. 중공군의 공세에 따라 1951년 1월 4일 대한민국 정부는 작전상 수도 서울에서 철수하였고, 서울 인근의 많은 주민들도 남쪽으로 피신했다. 이때 구리 지역 주민 상당수도 피난을 갔다. 후퇴하던 유엔군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강 변의 구리 토평리에서 동구릉(東九陵)까지 지뢰를 설치하였다. 이 지뢰들은 휴전 직후에 제거되었는데, 이때 완전히 제거되지 않아 훗날 농민이나 길을 가던 사람들이 지뢰를 밟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미국은 전쟁을 확대시키는 것과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 중 선택을 해야 했다. 결국 미국은 후자를 선택하여 1951년 전세(戰勢)가 소강 상태에 이르자 휴전 협상에 들어갔고, 1953년 7월 23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 협정의 체결은 전투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지 영구적인 평화에 합의한 것이 아니다. 항상 전쟁 재발의 위험은 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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